법조 2026년 6월호

대만 헌법사에 대한 연구 - 377 - 안점이 있었다. 1996년에는 제3차 증수조문에 따른 최초의 총통 직접선거가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대만 독립에 대한 논의가 대두되었고 국제사회에서 대만이 독자적 주권국임이 거듭하여 강조되자 결국 선거일 전날에 중국이 미사일 훈련을 하여 대만을 위협하였다.32) 한편으로 이듬해인 1997년은 홍콩이 영국으로부터 중국에 반환되는 해이기도 하였는데, 홍 콩의 반환과 ‘일국양제’ 체제의 채택은 대만 역시 중국에 흡수되는 형태로 통일되어야 한다 는 당위론이 다시 부각되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대만인들로서 는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33) 애당초 일국양제 자체가 홍콩보다도 오히려 대만 통일 을 염두에 두고 고안되었던 제도였기 때문이다.34) 한편 대만성은 중앙정부와 지역적 관할 이 적지 않게 겹쳤기 때문에 상징적으로나 실무적으로나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 고, 당시 대만성장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지지도는 총통에 대한 지지도에 견줄 수 있는 수 준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이 대만과 협상을 시도하면서 중앙정부가 아닌 대만성 정부 를 대화 상대방으로 지목하는 전략을 사용하게 될 경우 대만 입장에서는 권력 다툼과 정치 적 혼란으로 인하여 큰 위기가 초래될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35) 마. 1999년 제5차 증보수정 제5차 증수조문은 국민대회가 1999년 9월 3일 제정하고 총통이 1999년 9월 15일 이를 공포하였으나, 대만 사법원 2000년 3월 24일자 제499호 해석에서 무효로 결정되었다. 중화민국헌법에서 국민대회는 최상위 기구로서 총통을 선출하고 헌법을 개정할 권한이 있었지만 일상적인 입법권은 입법원에 속하였다. 그런데 앞선 4차의 증보수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민주화 과정에서는 입법원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확대된 반면 총통은 직접선거로 뽑 게 되어 국민대회의 역할은 축소되었으므로, 국민대회의 역할에 대한 회의가 대두되고 야권 에서는 국민대회 폐지론까지 제기하기에 이르렀다.36) 반면 국민대회는 국민대회를 사실상 의 상원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하여 의원 선출을 입법원 선거 결과에 따른 비례대표제로 바 꾸고 당시 의원들의 임기를 2년 연장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제5차 증수조문을 비밀투표 로 가결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개헌은 당시 국민대회 의원들 스스로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 32) Jiunn-rong Yeh, 앞의 책(주 15), p. 42. 33) 같은 책. 34) 전령현, “중국 '일국양제'의 홍콩특별행정구 적용에 대한 법적 연구 : 중앙과 홍콩특별행정구의 관계를 중심으로”, 박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2023. 2.), 25면. 35) Jiunn-rong Yeh, 앞의 책(주 15), pp. 42~43. 36) Jiunn-rong Yeh, 앞의 책(주 15), p.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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