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회생·파산사건 상담을 하다 보면 제도를 악용하려 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대다수는 막막한 처지에 놓 여있는 사람들이다. 카드 돌려막기로 버티다 무너진 사람, 남편 사업에 명의를 빌려주었다가 이혼 후 빚 을 고스란히 떠안은 사람,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한 사람, 고리 사채의 늪에 빠진 사람 등 보통의 서민들 인 것이다. 이런 분들이 어렵게 비용과 시간을 들여 법의 문을 두드렸음에도, 법을 다룬다는 자들의 불성실한 일 처 리로 회생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을 볼 때면 같은 법 조계의 일원으로서 할 말을 잃게 된다. 이 사건 역시 신뢰했던 조카와 변호사 사무실에 발등을 찍힌 꼴이 었다. 경험칙 상 파산 폐지 결정을 받은 후 곧바로 재신 청을 하면 법원에서 불리하게 볼 여지가 컸고, 의뢰 인의 시간적·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고 민이 깊어졌다. 하지만 사실대로 안내하고 의뢰인 스 스로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 서 여사 에게 전화를 걸어 사무실 방문을 요청했다. 사실 나는 지금도 의뢰인들에게 비용을 청구할 때 가 가장 망설여진다. 사정이 안타까워 분할 납부로 진 행해 주었는데, 정작 본인들은 변제 인가 결정을 받은 후 수임료를 떼어먹는 경우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사무실을 방문한 서 여사에게 우선 법원에 가서 폐지된 사건의 서류들을 열람·복사해 오도록 한 뒤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눈앞이 캄캄해진 서 여 사는 “법무사님, 그람 이제 우짜면 좋습니꺼?” 하고 반문했다. 나는 “몇 개월 추이를 지켜본 뒤 다시 신청 해 보자”고 하고, 조심스럽게 비용 이야기를 꺼냈다. 다행히 서 여사는 “돈은 어떻게든 만들어 볼 테니 걱정 마이소”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 모습에 나는 수임료는 일단 뒷전으로 미뤄두고, ‘이분만큼은 반드 시 내 손으로 면책을 받아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본격적인 상담을 통해 알게 된 서 여사의 삶은 눈 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1949 년생인 그녀는 경북 청도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후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시집가면 밥은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말만 믿고 결혼을 했다. 시부모와 어린 시누이까지 모시며 아들 둘에 딸 하 나를 낳았지만, 남편은 외지를 돌며 바람을 피우고 도박과 폭력을 일삼았다. 보다 못한 친정 남동생이 “누나, 이러다 맞아죽는다”며 손을 이끌어, 결국 어 린 자식들을 피눈물로 떼어놓고 도망치듯 집을 나왔 다고 한다. 배운 것 없는 여자가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공 장과 식당일뿐이었다. 악착같이 일해 돈을 모은 그녀 는 나이 쉰을 넘긴 2002년, 마침내 부산 자갈치시장에 ‘‘○○상회’라는 자그마한 생선 점포를 내게 되었다. 그곳에서 어린아이들을 키우며 살던 홀아비를 만 나 재혼도 했다. 전남편 집에 두고 온 친자식들이 생 각나 재혼한 남편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키우며 헌 신적으로 뒷바라지해 모두 결혼까지 시켰다. 자갈치시장 생선장사도 10년이 넘게 제법 잘 지탱 해 왔으나, 2012년부터는 불황이 시작되며 수지타산 이 맞지 않아 물품 대금이 밀리기 시작했다. 서 여사는 급한 마음에 고리 사채에 손을 댔고 빚 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2016년, 그녀는 수많 은 부채와 미납 세금만을 안은 채 생선점포를 폐업했 다. 설상가상으로 두 번째 남편마저 다른 여자가 생겼 다며 이혼을 요구했고, 사채업자들의 빗발치는 독촉 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결국 야반도주를 택해야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인생의 첫 단추가 잘 못 꿰어진 이후, 왜 두 번째, 세 번째 단추마저 계속 어긋나기만 하는지 가슴이 아려왔다. 마음을 추스르 고 몇 개월이 지난 2021년 8월, 우리는 다시 한번 파 산 신청을 진행해 보기로 했다. 부채증명서를 발급해 보니 주거조차 불안정한 70 자갈치 아지매의 눈물겨운 반평생 파산 재신청, 그리고 7번의 보정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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