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법무사 9월호

69 2026. 9. September Vol. 711 시’)은 라틴어 표기(‘Circe’)를 영어식 발음 규칙으 로 읽으며 생긴 왜곡인데, 정작 한국어 ‘키르케’가 그리스어 원음에 훨씬 가깝다. 드라마 「왕좌의 게 임」의 여성 빌런 이름도 ‘서시 라니스터’였는데, 여 기서 따왔나 하고 찾아봤더니 철자는 달랐다. 그러 나 연관은 있겠지. 정리하면 세 갈래 경로가 뒤섞여 있다. ①그리스 어에서 영어로 직행하며 음운이 단순화된 경우(오디 세이, 헬렌), ②그리스어에서 라틴어를 거쳐 아예 다 른 이름이 된 경우(율리시스), ③라틴어 표기를 영어 식 발음 규칙으로 읽으며 오히려 원음에서 더 멀어 진 경우(서시, 사이렌). 그리고 그 사이사이, 한국어 표기가 뜻밖에도 이런 왜곡을 우회해 원음에 더 가 깝게 남아 있는 지점들이 있다. 이 현상은 낯설지 않다. 한자음, 특히 한국 한자음 의 경우와 정확히 같은 구조이기 때문이다. 한국 한 자음은 중고한어(中古漢語, Middle Chinese)의 음 가를 상당히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어서, 정작 중국 음운학자들이 재구(再構) 작업의 참고 자료로 삼는 경우가 실제로 있다. 그리스어와 영어의 관계, 그리고 중국어와 한국 한자음의 관계는 흥미로운 대칭을 이룬다. 전자는 ‘주변부로 이동하며 원음이 마모’된 경우이고, 후자 는 ‘주변부(한반도)로 전파되면서 오히려 중심부(중 국 본토)보다 옛 음가를 더 잘 보존’한 경우다. 언어 접촉에서 주변부가 때로 중심부보다 더 보 수적인 화석 역할을 한다는, 하나의 공통된 원리가 두 사례를 관통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의 배경, 트로이 공방전을 다루는 우리말 표 현에서도 짚을 지점이 있다. ‘농성(籠城)’은 방어하 는 쪽의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자 그대로 ‘성 (城)에 틀어박히다(籠)’는 뜻이니, 포위당한 상태에 서 버티는 쪽에만 쓸 수 있다. 그러니 트로이아군이 성안에서 방비하며 버티는 것은 농성이 맞다. ‘트로 이아군은 10년간 농성했다.’ 반대로, 그리스 연합군이 성 밖에 진을 치고 공격 을 준비하는 것은 농성이 아니라 ‘포위(包圍)’ 혹은 ‘공성(攻城)’이다. ‘그리스군은 성을 포위했다’, ‘공 성전을 준비했다.’ 일상어에서 ‘성을 둘러싼 대치 상황’ 전체를 뭉뚱 그려 ‘농성’이라 부르는 관행 때문에 혼용되기 쉽지 만, 엄밀히는 방어 주체의 행위로 한정해야 정확하 다.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농성했다’처럼 늘 안에서 버티는 쪽에 쓰인다는 걸 떠올리면 구분이 쉽다.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Athena, Αθηνά) 역을, 텔레마코스로 분(扮)한 톰 홀랜드(Tom Holland)의 배우자인 젠데이아(Zendaya)가 맡은 것도 신기하고 재밌는 일이었다. 아테나가 들고 다 니는 방패가 원래는 제우스의 것이었던 ‘아이기스 (Αιγίς)’인데, 이것의 영어식 이름이 ‘이지스(aegis)’ 이다. 미 해군 구축함의 이름이 여기서 따온 것이다. 아테나의 로마 이름이 ‘미네르바(Minerva)’인데,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야 날개를 편다’는 유명한 문장이 떠오른다. 이는 철학(지혜)이 앞날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지나간 뒤에야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출전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법철학강요』. 영화 관람 후기를 겸해 적어 보려 하다가, 여기까 지만 적게 되었다. 영화의 각본집을 구입했고, 위 헤 겔의 책도 다시 꺼내서 읽어 보아야겠다. 아테나에 관한 재밌는 얘기 한두 가지 법률가의 바른 글쓰기 슬기로운 문화생활 농성인가 포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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