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법무사 9월호

ISSN 2233-4688 09 2023 vol .675

발행인 이남철 편집인 박철훈 편집주간 김병학 편집위원 강상수·강성구·강신기·권중화·김정준·김정호·박성익 박윤숙·윤정진·윤평식·이경록·장태헌·정진홍·최상익 편집장 임정와 편집간사 김승준 발행처 대한법무사협회 발행일 2023년 9월 5일 통권 제675호 디자인·인쇄 주식회사 더블루랩 일러스트 혜영드로잉 정기간행물 등록 1965년 5월 7일 강남, 라 00102호 주소 서울시 강남구 논현로 651 (논현동, 법무사회관) 전화 02)511-1906~9 팩스 02)546-4362 이메일 <편집부> kabl@hanmail.net 홈페이지 www.kabl.kr 비매품 ※ 본지에 게재된 글들은 대한법무사협회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 건 해 결 , 의 뢰 인 과 함 께 기 뻐 하 다 9 월 법 무 사 의 소 소 일 상

Contents 2023년 9월 vol. 675 08 36 법으로 본 세상 10 열혈 법무사의 민생 사건부 _ 생존자에 대한 사망 기재 호적 정정 사건 (2022.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16 그럼에도 행복하고 싶다 _ 혼자 있을 때 가장 덜 외롭다 22 주목 이 법률 _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을 통한 사법입원제 도입의 전망 26 법률고민 상담소 _ 가사비송, 민사신청, 개인파산, 주택임대차 분야 30 새로 시행되는 법령 _ 「청소년활동 진흥법 시행령」 일부개정 (2023.8.1. 시행) 등 91 내가 만난 법무사 _ 문은지 법무사(서울중앙회) 동정·등록 82 협회는 지금 _ 협회 · 지방회 · 법무사 동정 86 법무사 등록공고 · 신규등록 90 편집위원회 레터 _ 한문유감

법무사 시시각각 08 현장 리포트 _ ‘전세사기 피해자 경·공매 지원센터’ 개소 32 이슈와 쟁점 _ Gallup 「법무사의 사법보좌관 업무 관련 국민인 식 조사」 결과와 의미 _ 법무부 「수사준칙」 개정령안의 주요 내용과 향 후 과제 _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23.7.17.자 2021도 11126)의 의미 44 이슈 투데이 _ 전여법 「미혼부자녀 출생신고 개선을 위한 국회 토론회」 개최 등 46 법무사가 사는 법 _ 부산회생법원 희망출발 상담센터 상담위원, 박성진 법무사 50 성년후견 사례 _ 피성년후견인의 재산 횡령과 관련해 성년후견 인에게 실형이 내려진 사례 82 46 슬기로운 문화생활 04 미경유람 _ 포항 불꽃축제 72 한국인은 왜 _ 한국의 갑질 문화, 일상적으로 만연한 이유 76 문화路 쉼표 _ (수상) 원수와 형제애 78 부자되는 책읽기 _ 세스 고딘, 『린치핀(Linchpin)』 80 소확행 건강관리 _ 심폐력 강화 유산소 운동, 러닝의 매력 현장활용 실무지식 52 맞춤형 최신 대법원 판례 요약 _ 2023.5.23.자 2022마6500결정 등 56 나의 사건수임기 _ 별거 중에 출생한 혼외자의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사건 60 법무사 실무광장 _ 각 수사기관(경찰·검사·공수처) 결정에 대한 이의절차 66 유비무환, AI 이야기 _ 한국형 GPT, 왜 계속 늦어지고 있을까?

포항 불꽃축제 06 미경유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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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법무사, 전세사기피해자 경·공매 절차 지원한다 대한법무사협회-국토부·HUG 협력해 ‘전세사기피해자 경·공매 지원센터’ 개소 08 현장 리포트

2023. 09 vol.675 경·공매 절차의 전문가인 법무사들이 전세사기 피해를 입고도 생업 등에 쫓겨 경·공매 절차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임차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지원 활동에 나섰다. 대한법무사협회(협회장 이남철)는 국토부(장관 원희룡), 주택도시보증공사(사장 유병태, 이하 “HUG”)가 지난 8.9. 서 울 종로구 광화문G타워(2층)에서 개최한 ‘전세사기피해자 경·공매지원센터’ 개소식에 참석해 위와 같은 취지를 밝혔다. 대한법무사협회는 지난해 7월, 전세사기 사건의 피해자 보호 및 구제를 위해 HUG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전국 법 무사 413여 명이 참여하는 ‘전세피해지원공익법무사단’을 구성, HUG의 각 지역 ‘전세피해지원센터’를 중심으로 피해 자 지원 활동을 진행해 왔다. 이번 지원사업은 「전세사기피해자지원특별법」의 7.2. 시 행에 따른 것으로, 협회는 기존 공익법무사단을 확대 운영키 로 하고, 153명의 공익법무사를 추가해 우선 서울지역 법무 사를 대상으로 오리엔테이션을 실시한 후 ‘전세사기피해자 경·공매지원센터(이하 “센터”)’에 배치, 활동을 시작했다. 센터에 배치된 공익법무사는 선순위·후순위 임차인, 최 우선변제금 대상 여부 등 전세사기 피해자 개인별 상황에 맞 춰 경·공매 유예·정지신청, 우선매수권 행사, 조세안분신청 등 피해 최소화를 위한 법률상담을 진행하며, 절차 지원에 있어 서도 경매신청부터 낙찰, 배당에 이르는 전 과정을 대행한다. 전세피해지원위원회에서 피해자로 인정받은 임차인이 라면, 경·공매지원센터(☎1588-1663)를 포함해 전세피해 지원센터(4개소), HUG 영업점(9개소), 안심전세포털(www. khug.or.kr) 등에서 방문 상담 신청이 가능하며, 방문이 어려 운 경우에는 원하는 법무사를 직접 선택해 가까운 곳에서 지원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 이남철 대한법무사협회장은 이날 개소식에서 “법무사 는 ‘출생에서 상속까지’ 생활법률전문가로서 이미 전국각지 에서 공익적 차원의 구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며, “이번 경·공매 절차 지원 역시 경매 시작부터 입찰, 배당까지 피해 자들에게 신속하고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공익법무사에 대한 교육과 활동 안내 등 최선을 다해 뒷받침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날 개소식에는 이남철 협회장 및 정경국 전세피 해공익법무사단장, 국토교통부 박병석 전세피해지원단장, HUG 김옥주 자산관리본부장 등이 참석했다. <편집부> ┃ 법무사 시시각각 현장 리포트 09

유병일 ● 법무사(서울서부회) 망자였던 어머니, 48년 만에 살려낸 아들 생존자에 대한 사망 기재 호적 정정 사건(2022.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10 열혈 법무사의 민생 사건부 법무사가 실제 수임한, 이 시대 민초들의 생활사건 이야기

2023. 09 vol.675 요즘은 주민등록등본이나 가족관계증명서 등 신 분에 관한 증명서류들의 기록과 발급 등이 전자화되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예전에는 이러한 서 류들이 모두 수기로 작성되고, 발급 또한 관련 관청을 방문해 순서를 기다려 받아야 했다. 일일이 사람 손을 거쳐야 하는 일이다 보니 담당 공무원이 신분 서류에 정보를 기재하는 과정에서 오기 하는 등의 실수가 종종 발생했고, 1990년대부터는 호 적 전산화가 시작되며 호적 상의 신분 정보를 일일이 전산망에 옮겨 입력하는 과정에서 오기·탈자·누락되 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각종 신분 서류의 문제를 정정하는 업 무가 법무사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되었다. 살아있는 어머니를 사망신고, 법원은 정정 신청 기각 2022년 여름 어느 날, 푹푹 찌는 무더위가 한창 인 오후. 박장남 씨는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신청을 기 각한다는 법원의 결정문을 들고 필자를 찾아왔다. 그 의 사연은 이러했다. 1974년, 박장남 씨의 부친은 다른 여성(현 부인)과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생존해 있는 모친을 사망한 것 으로 신고하였고, 그로 인해 모친은 호적에 “사망자”로 기재되었다. 그동안은 고령의 모친이 오랫동안 시골 동 네에 거주하고 있어 이웃들끼리 잘 알고 지내고 있고, 주민등록표가 작성되어 주민등록번호까지 부여되어 있으므로 크게 불편한 것이 없어 그냥 생활해 왔다. 그러나 코로나가 발생하며 모친이 국가 건강관리 대상에 포함되었고, 군청으로부터 “고령의 모친이 실 제로 돌아가시게 되면 문제가 아주 복잡해질 수 있으 니 하루속히 신분 관계를 정리하라”는 요구를 받게 되 었다. 그리하여 박장남 씨는 군청에 재직 중인 친척에 게 부탁해 법원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신청을 했는 데, 신청 취지와 이유가 너무 허술하다는 이유로 법원 의 기각 결정을 받고 말았다. 당연히 허가 결정이 날 줄 알았던 박장남 씨는 깜짝 놀라서 뒤늦게 여러 법률사 무소를 방문했지만, 이미 기각된 사건은 다시 신청해도 허가되기 어렵다며 다들 꺼리는 눈치였던지라 아직까 지 정정 신청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장남 씨의 이야기를 들은 필자는 마침 비슷한 사건을 처리해본 경험이 있었던지라 바로 사건을 맡겠 다고 했다. 너무 선뜻 수임하겠다고 해서일까, 박장남 씨는 반신반의하며 “한 번 기각된 사건이라 신청해도 바로 각하된다고 하던데, 또 신청해도 될까요?”, “법원 에서 허가를 받을 수 있겠지요?”라며 재차 확인하는 질문을 했다.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은 비송사건이다. 비송사건 은 기판력이 없어 다시 신청해도 된다. 필자는 “같은 종류의 사건을 처리한 경험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답하며, 그가 발급받아야 할 서류의 목록을 작성해 건네주었다. 어머니의 사망 기재가 말소된다면, 아버지는 중혼이 되고 얼마 후 박장남 씨가 서류들을 모두 발급받아 사 무실을 방문했다. 서둘러 서류를 살펴보니 그의 모친 박장남 씨의 부친은 다른 여성과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생존해 있는 모친을 사망 신고하여 모친이 “사망자”로 기재되었다. 시골에 사는 모친이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아 이를 바로잡지 않고 있었는데, 최근 코로나로 모친이 국가 건강관리 대상에 포함되며, 군청에서 신분관계를 정리하는 요청을 하여, 법원에 정정신청을 했으나 기각 결정이 났다. ┃ 법으로 본 세상 열혈 법무사의 민생 사건부 11

인 이망자 씨는 1974년 사망신고가 되어 있었고, 그 2 년 후인 1976년, 이망자 씨의 남편이자 박장남 씨의 부 친인 박대풍 씨가 다른 여성과 혼인신고를 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었다. “1968년, 최초 작성”이라고 쓰인 이망자 씨의 주민 등록표 초본에는 평생을 같은 집에서 살았는지 주소가 변동된 적이 없었다. 당시는 수기로 공문서를 만들던 때 였으니, 아마도 사망신고 후 주민등록이 말소되지 않았 던 것 같다. 그래서 이망자 씨는 자신의 사망신고 사실 을 모르고 살다가 어느 순간 알게 되었으나 특별히 호 적을 사용할 일이 없어 그냥 두고 살다 보니 고령으로 사망을 앞둔 현시점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실관계에 대한 정리와 관련 서류가 모 두 확보되었으니 이제는 법률검토의 시간. 일단 이번 사건은 기판력이 없는 비송사건으로서 재신청에는 문 제가 없으나, 실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중혼 사건 이었기 때문에 꼼꼼한 검토가 필요했다. 이망자 씨의 남편인 박대풍 씨가 다른 여성과 혼 인신고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망자 씨의 사망 기재 가 말소되는 동시에 다시 박대풍 씨의 배우자로 기입 된다면, 두 번째 혼인신고(현 부인과의 혼인신고)는 ‘중 혼’으로 문제가 된다. 그러나 필자는 중혼은 무효가 아니라 취소사유 이므로 큰 문제는 없겠다고 보고, 이번 사건과 비슷하 게 생존자를 사망신고 했던 오래전 사건의 기록을 찾 아 살펴보았다. 이혼 후 장기간 연락이 두절된 부친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자녀들이 당시 「호적법」에 따라 보증인 2명을 세워 사망신고를 한 사건이었다. 사망신고 후 호적제도가 폐지되고 「가족관계등 록법」이 새롭게 시행되며 호적이 전부 폐쇄되었기 때 문에 이미 폐쇄된 호적의 정정, 관련자들의 새로운 「가 족관계등록법」 상 신분관계 증명서 작성 등 이번 사건 과 업무적으로 유사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자료들은 당연히 호적 정정이 가능 하다는 전제에서 작성되었던 탓에 아쉽게도 참고할 만 한 관련 예규나 선례 등이 인용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큰 틀에서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허위 사망신고, 호적 정정 가능” 선례 찾아 재신청서 제출 필자는 이미 불허 결정이 난 사건에 대한 재허가 신청이므로, 관련 법리를 보다 명백히 할 필요가 있겠 다는 판단이 들어 참고할 만한 다른 호적예규와 선례 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허위의 사망신고에 의해 생존 자가 호적상 제적 처리되어 있다면, 호적정정 신청을 통해 제적 처리된 호적을 부활 기재할 수 있다”는 내용 의 호적선례(제2-451호)를 찾을 수 있었다. 선례에는 구체적인 절차까지 명시가 되어 있었는 데, “이해관계인이 그 호적이 있는 곳을 관할하는 가정 법원(지방법원 또는 지원 포함)에 그가 살아있다는 충 분한 소명자료를 첨부하여 ‘그의 호적을 부활하고 사 망사유를 말소하라’는 취지의 호적정정 허가신청을 한 후 허가결정을 받아 1월 이내에 위 허가결정등본을 첨 부하여 본적지 시(구)·읍·면의 장에게 호적정정 신청” 을 하면 되었다. 기각당한 사건의 정정 신청 취지에도 “사망자의 호적을 부활하고 사망사유를 말소하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필자가 찾은 위 선례를 참조한 것 같 았다. 필자는 자신있게 재신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우선 신청 취지는 구체적으로 적어야 하므로, 법 12

2023. 09 vol.675 비송사건은 기판력이 없어 재신청이 가능했으나 이미 불허 결정이 난 사건이니 만큼 관련 법리를 명백히 하기 위해 “생존자를 허위로 사망신고한 경우 호적정정이 가능하다”는 선례(제2-451호)를 찾아 재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법원이 보정명령으로 제출을 요구한 유전자 검사서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결국 사건은 또다시 기각되고 말았다. 원행정처에서 2020년 12월 발간한 『가족관계등록비 송 결정 주문 기재례집』을 참조(p.165)하여 3가지 주문 사항을 작성하였다. 『① 본적 전라○○ ○○군 ○○면 ○○리 ○○○ 번지 호주 ○○○의 제적부 중 신청인 겸 사건본인이 본인의 신분사항란에 기재된 “1974년 ○월 ○일 오전 ○시 ○○군 ○○면 ○○리 ○○○번지에서 사망 동거 하는 친족 ○○○ 서기 19○○년○월○○일 신고”를 말소하고, ② 본적 전라○○ ○○군 ○○면 ○○리 ○○○ 번지 호주 ○○○의 신분사항란 중 “기타 [배우자의 사망일] 19○○년○○월○○일 [배우자]○○○”을 말 소하고 신청인 겸 사건본인 ○○○을 처로 이기 입적 하며, ③주문 2항을 기초로 등록기준지를 “전라○○ ○○군 ○○면 ○○리 ○○○번지”로 하는 신청인 겸 사건본인의 가족관계등록부를 작성하는 것을 허가한 다.』 또, 신청이유에는 사실관계를 기술하고, 중혼이 취소사유라는 「민법」 제816조 등 관련 법조문을 인용 함과 동시에 대법원 판결(95다 48308)을 통해 중혼에 대한 법리해석을 밝히는 한편, 이미 검토한 호적선례 (제2-451호) “허위의 사망신고에 의하여 호적상 제적 처리된 경우의 호적정정절차 제정(1988.5.28.)”을 인용, 절차적으로 법원의 허가가 필요한 이유를 최대한 상세 하게 기술하였다. 유전자 검사서 제출기한 넘겨 두 번째로 기각 결정 재신청서를 제출하자 법원에서 연락이 왔다. 이전 에 기각된 사건과 동일한 사건인지를 확인하는 전화였 다. 필자는 “동일한 사건이며, 비송사건이라 기판력이 없어 다시 신청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아마도 법원 역시 모든 내용을 확인했으나 필자가 이전에 기각된 사건인 지를 알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해 보려는 것 같았다. 필자가 사실을 모르고 신청해 만약 준비 부족으 로 또다시 기각 결정이 난다면, 신청인과 필자, 법원 모 두가 난처해지니 미리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의미의 친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약 2주 후 법원의 보정명령이 내려졌다. 이 망자 씨의 생존을 증명하기 위해 가족관계등록부상 이망자 씨의 자녀 2명과 유전자검사를 하여 그 검사서 와 현 부인이 이망자 씨의 생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에 대한 확인서를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현 부인의 확인서를 제출토록 한 것은 이망자 씨 의 사망기재가 말소되고 다시 신분관계증명서가 작성 ┃ 법으로 본 세상 열혈 법무사의 민생 사건부 13

같은 사건에 대한 세 번째 신청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꼭 허가 결정이 날 수 있도록 아주 조심스럽고 세세하게 정정신청서를 작성했다. 보정기한을 못 지킨 이유를 상세히 기술하고, 보정명령문과 보정서류를 모두 첨부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달 반만에 허가결정문이 나왔다. 보정명령 미이행으로 각하된 사건인데, 이렇게 빠르게 허가 결정이 난 것은 드문 일이었다. 되면 중혼이 되므로 현 부인의 권리 보호 차원에서, 또 는 유전자 검사와는 별도로 이망자 씨의 생존 사실을 중복하여 확인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박장남 씨는 유전자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 는 동안 현 부인을 찾아가 확인서를 작성해 달라고 요 청했다. 현 부인은 이망자 씨의 가족관계등록부가 복 원되면 박대풍 씨와 자신이 혼인한 사실과 자신이 출 산한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고 한다. 박장남 씨는 “중혼은 혼인 취소 사항인데, 혼인 취소가 되어도 소급효가 없어 신분 관계에 아무런 불 이익이 없다고 하더라”며, 필자에게 들은 설명을 자세 히 해주면서 현 부인을 설득, 결국 “조금 더 알아본 후 확인서를 작성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모든 일이 필자의 생각처럼 돌아가지는 않았다. 유전자 검사 회사가 자신하던 것과는 반대로 오래도록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 법원의 제출기한을 넘겨버린 것이다. 법원은 곧바로 미보정을 이유로 정정 신청을 각하하였다. 보통은 보정기한이 조금 지나도 바로 각하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유전자 검사 결과가 오늘내일 나온다는 회사의 말을 믿고 기다리다가 각하를 당한 것이다. ‘이 럴 때를 대비해 미리 보정기한 연기신청을 했어야 했 나…’, 기각 결정에 필자의 과실도 있는 것 같아 매우 당혹스러웠다. 박장남 씨에게 유전자 검사 서류 미제출로 사건 이 각하되었다고 하자 그 역시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필자는 현 부인의 확인서를 받은 후 유전자 검사 결과 가 나오면 다시 신청하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를 달랬다. 그로부터 약 일주일 후 유전자 검사서와 현 부인 의 확인서가 모두 완비되었다. 일주일 차이로 신청이 각하된 것이라 새삼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다시 신청 하면 되니 크게 보면 대단한 문제는 아니다. 필자는 세 번째 신청에 대한 보수는 받지 않기로 했다. 박장남 씨 는 “이번에는 잘 될 것 같다”며 안심하고 돌아갔다. 철저한 준비로 세 번째 정정신청, 마침내 허가 결정 같은 사건에 대한 세 번째 신청. 필자도 이런 경 우는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꼭 허가 결정이 날 수 있도록 아주 조심스럽고 세세하게 정정신 청서를 작성했다. 보정기한을 지키지 못한 이유를 상세 하게 기술하고, 보정명령문 및 보정서류를 모두 첨부했 다. 이후 법원 사이트에서 사건 진행 상황을 확인해 보니 법원이 경찰에 사실조회서(범죄경력 및 주민정 14

2023. 09 vol.675 보) 제출을, 금융기관 한국신용정보원에 이망자 씨 금 융거래내역의 제출을 각각 명하는 등 직권조사를 진행 하고 있었다. 이런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쳐 마침내 한 달 반 만에 허가결정문이 나왔다. 법원이 보정명령 미이행으 로 각하된 사건을 다시 신청하여 이렇게 빠르게 허가 결정을 내린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아마도 신청인이 고령이라 사망 전 처리하여 복 잡한 법적 절차를 피하도록 미리 보정명령 이행을 전 제로 절차를 준비해 두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필 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어떻든 빠른 결정은 긴장했던 필자의 마음을 활 짝 풀어주었다. 박장남 씨에게 연락해 법원에서 허가결 정문이 왔다고 알리자 무척 기뻐하는 한편으로 놀라 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건이 두 번이나 기각되다 보니 주변에서 세 번째 신청도 무조건 안 될 거라고 하여 많 이 좌절한 상태였단다. 필자는 정정 신고는 꼭 이망자 씨의 거주지 군청 을 방문해서 하라고 권했다. 사실관계를 잘 아는 곳에 서 해야 아무래도 더 편하고 신속하게 처리될 것이다. 며칠 후 결정문을 받기 위해 박장남 씨가 사무실 을 방문했다. “고생 많으셨다”고 인사를 건넨 그는, 결 정문을 받아들고 사무실을 나서다 갑자기 뒤를 돌아보 며 “법무사님, 등기도 하시지요?”라고 물었다. 평소 민·형사사건을 위임한 의뢰인들에게 자주 듣던 그 질문이 아닌가. “그럼요, 불법 아니면 다 처리해 드립니다.” 박장남 씨는 이망자 씨가 지금 서울에 올라와 있 는데, 고령이라 더 이상 시골에서 거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시골집을 매매하려 하니 소유권이전등기를 하러 오겠다고 했다. “법무사님 아니면 영영 정정을 못 할 뻔했어요” 그리고 한 달 후쯤, 진짜로 박장남 씨가 소유권이 전등기를 하겠다며 필자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필자는 호적정정 절차가 잘 처리되었는지 궁금해 물어보았더 니 그가 손사례를 치며 말했다. “아이고, 말도 마세요. 군청을 방문해 정정 신고 를 했더니 담당 공무원이 당황해서는 여기저기 전화하 고 야단이더라고요. 그러고는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사 건의 허가 결정을 받아냈냐며 신기하다고 하는 겁니 다.” 그는 “법무사님 아니면 영영 못 할 뻔했다”며 필 자에게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필자도 생존해 있는 사 람을 사망 처리하여 호적을 정정하는 사건은 두 번 다 시 수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사건을 또 접하게 되어 신기했다. 법적으로 사망한 사람을 48 년 만에 다시 살려낸 셈이니 특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건이다. 2008.1.1. 「가족관계등록법」의 제정, 시행으로 신 분관계증명서가 새롭게 작성되는 과정에서 이번 사건 과 같이 구 호적상의 많은 오류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심지어는 생년월일만 있고 주민등록번호는 없는 경우 까지 발견되기도 했으니 반드시 법적인 정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국가에서 적절한 대응을 준비하고 있겠으나, 법 무사로서도 일반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신분관계 등록에 대한 중요성을 새삼 되돌아보 게 하는 사건이었다. ┃ 법으로 본 세상 열혈 법무사의 민생 사건부 15

위기의 시대에도 행복을 찾아가는 12가지 인문학적 성찰 ⑨ 혼자 있을 때 가장 덜 외롭다 유창선 ● 인문학 작가 16 그럼에도 행복하고 싶다

2023. 09 vol.675 혼자 있다는 것은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과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혼자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사유를 하고 활동적 삶을 위한 에너지를 채우는 것이다. 그러니 혼자 있는 것을 피하거나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혼자서 놀 줄 모르는 사람 실제로 주변을 둘러보면 혼자서 다니고 놀 줄 모르는 사람들이 무척 많음을 알게 된다. 가까운 사례를 들자면, 특히 많은 사람이 어려워하는 것이 혼자 음식점에 들어가 식사하는 ‘혼밥’의 상황이다. 다들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앉아있는 음식점에서 혼자 식사를 하려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이 되고 어쩐지 외톨이가 된 기분이 들어 영 불 편하다는 것이다. 조직에 몸담아 생활하며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곤 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런 상황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어느 음식 평론가가 혼밥 문화를 비판하 는 얘기를 했다가 논란이 된 적도 있었다. 방송을 통해 많이 알려진 그는 혼밥 문화에 대해 “혼 자서 밥을 먹는 것은 인간 전통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혼밥 은 소통을 하지 않겠다는 사인이라고 볼 수 있다”며, “밥을 혼자 먹는 것은 소통의 방법을 거부하는 거다. 싫다고 해서 나는 나 혼자서 어떤 일을 하겠다. 점점 안으로 숨어드는 건 자폐다”라고 발언해 많은 반발을 샀다. 나도 그 얘기를 접하고는 참 어처구니가 없었던 기억 이 난다. 혼자 밥 먹는다고 자폐라니. 각자의 사정에 따라 혹은 취향에 따라 혼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인데, 이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 평소 공연장에 자주 가곤 한다. 오 롯이 작품에만 집중하기 위해 혼자 다 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예술의전당 이나 롯데콘서트홀에 가보면 나처럼 혼 자서 관람하러 온 사람들도 많다. 퇴근 하고서 공연장을 찾은 것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특히 많다. 그렇게 혼자 공연장을 찾은 사람 이 쓸쓸하게 보인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그 모습들이 이상하 게 느껴지기는커녕 참 보기가 좋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누리기 위 해 혼자서라도 저렇게 열성적으로 다닐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 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다.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거나 민 폐를 끼치면서 나 자신을 위한다면 에 고이스트라는 말을 듣게 되겠지만, 그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 모습 은 자존감과 자기애에 충만한 모습이 다. 자기가 좋아하고 즐기는 것들을 위해 혼자서 다닐 수 있는 자유가 멋있 어 보일 뿐이다. 그런데 다들 그렇지는 않은가 보 다. 큰딸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우리 아버지는 혼자서도 공연 보러 잘 다닌 다”고 친구에게 얘기하면 좀 놀란다는 것이다. 장년의 남자가 혼자서, 때로는 젊은 세대 취향인 공연에 가서 앉아 있 는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나 보다 싶 었다. ┃ 법으로 본 세상 그럼에도 행복하고 싶다 17

도 모자란데 4인용 테이블을 혼자 차지 하게 되거나, 아니면 모르는 사람들과 합석해서 마주보고 앉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은 낮 12시부터 1시까 지의 시간대는 일반 음식점들도 혼자 들어가기가 좀 어렵다. 혼자서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있기에는 눈치도 보이 고, 아예 혼자서는 안 된다고 나가게 만 드는 곳들도 많다. 그래서 외부 음식점 에서 혼자 점심을 할 때는 피크시간을 피해서 사람이 적은 시간대에 들어가 곤 했다. 시간대에 따라 약간의 불편함은 있었지만 내게 혼밥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으니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아예 혼밥의 시간을 즐기곤 했다. 누구 눈치 볼 일 없이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자 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먹으면서 이 생 각 저 생각 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굳이 식사하면서 이 얘기 저 얘기 나누 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서도 자유롭 다. 내게 혼밥의 시간은 휴식의 시간 이기도 했고, 나 자신을 위로하는 시간 이기도 했다. 특히 하루의 숨 가빴던 일 들을 다 끝내고 혼자 맛집에 들어가 ‘다 찌’에 앉아 천천히 저녁을 먹으며 수고 한 자신에게 여유를 가져다주는 시간 을 무척 좋아했다. 혼자 있다는 것은 자기와 함께 있다는 것 이게 어디 ‘혼밥’에 관한 얘기뿐이 겠는가. 평생을 조직에서 사람들과 함 상한 사람들인 양 낙인찍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시선이라 고 생각했다. 마치 나의 프라이버시 영역에 낯선 사람이 침입해서 는 느닷없이 심판하려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야말로 혼 밥을 즐기는 대표적인 혼밥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자폐증’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다. 혼밥, 나 자신을 위로하는 시간 내 경우는 30년 가까이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이 방송 저 방송을 옮겨 다니는 생활을 했던지라, 혼밥이 무척 자연 스럽고 익숙하다. 그날그날의 방송 스케줄에 따라 중간에 방송사 주변 어디에선가 밥을 먹어야 했다. 내가 출연한 프로그램들은 주로 이른 아침 시간에 많 이 편성되어 있는지라, 방송이 끝나고 나서야 음식점에 들 어가 아침을 먹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이동 시간에 쫓겨 방송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어 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서 테이블이 만석이 되는 점심시간에 혼자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은 사실 조금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는 하다. 자리 18

2023. 09 vol.675 의 조건』 마지막 문장과 『정신의 삶』 첫 문장에서 로마 철 학자 카토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때 그 어느 때 보다 활동적이며, 혼자 있을 때 가장 덜 외롭다.” 혼자 있다는 것은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 렌트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과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혼자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 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사유를 하고 활동적 삶을 위한 에너 지를 채우는 것이다. 그러니 혼자 있는 것을 피하거나 두려 워할 이유는 없다. 함께 어울려도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고독 물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얘기를 나누면 서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함께 어 울림으로써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누구에게나 있다. 사회 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이 말했던 ‘고독한 군중’은 겉으로 드 러난 사회성의 그늘 뒤로 불안과 고독감을 지니고 있는 사 람들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살아가는 사람도 내 께 일하고 식사하고 회식도 하면서 살 다가, 은퇴한 후에 ‘혼자 살기’에 적응하 지 못한다는 얘기를 많이 전해 듣는다. 평생 일하느라고 고생했으니까 은퇴하 고 가정으로 돌아오면 가족들이 다들 반겨주고 함께해 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내는 친구들을 만나며 자기대 로의 생활세계가 구축되어 있고, 자식 들은 바빠서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상대해 줄 겨를이 없다. 허망한 기대를 접고 이제 자기 혼자서 식탁에 앉아 점 심을 챙겨 먹는 생활에 적응해야 한다. 그리고 더는 고독감과 허망함에 빠져들지 않도록 혼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아마도 장년 의 세대가 많이 겪곤 하는 홀로서기의 숙제일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특히 남성들 은 혼자 노는 데 익숙하지 못한 편이다. 평소에 공연장이나 전시장, 인문학이나 문화예술 강좌 같은 곳에 다니다 보면 여성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음을 발 견하게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소 중히 여기며 찾아다니는 데 여성들이 훨씬 열의가 많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면 남자들은 대체 무엇을 통 해 ‘자기의 것’들을 찾고 있을까 하는 물음이 떠오르곤 했다. 무리 지어 술 마 시는 것 말고는 딱히 놀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혼자인 것을 겁내면 자신 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을 온전히 누 리기 어려울 수 있다. 자기가 원하고 좋 아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혼자여도 상 관없다는 마음을 가질 때 타인들의 시 선에 갇히지 않는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이 말했던 ‘고독한 군중’은 겉으로 드러난 사회성의 그늘 뒤로 불안과 고독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살아가는 사람도 내면의 고독을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자주 혼자 있는 것은 오히려 고독을 풀어주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철학자 니체의 삶은 인간이 고독 속에서 오히려 강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 법으로 본 세상 그럼에도 행복하고 싶다 19

누구보다도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철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당대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철학자 다. 친구들도 그의 새로운 사상을 이해 하지 못했고, 그가 쓴 책은 대중의 관심 을 끌지 못했다. 그는 인기 있는 저자가 아니었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낸 후에는 모두 자비 출판을 해야 했다. 그 자신이 “나 자신의 때도 아직은 오지 않 았다. 몇몇 사람은 죽은 후에야 태어나 는 법”이라며 자신에 대한 평가는 후대 에 가서야 가능할 것임을 예언했다. 인간의 정신은 가장 고독할 때 최고로 각성된다 한편, 그의 고독한 작업은 시력과 정신력을 갉아먹었다. 말년에 니체는 시 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고, 그의 말기 저 작들은 병마와 싸우면서 나온 것이다. 그가 병원에서 쓴 자전적 글들을 모은 『나의 여동생과 나』가 1923년에 출판되 었다. 그 글에서 니체는 자신의 생을 “‘자유’와 ‘숙명’이 벌이는 결투였고, ‘신 이 되려는 나의 욕망’과 ‘한 마리 벌레 로 남아야 할 숙명’이 벌이는 결투”였다 고 회고한다. 그에게는 삶이 곧 결투였 던 것이다. 하지만 병마와 고독의 고통 속에서도 니체는 자신의 삶을 긍정했다. “힘들게 위액을 토해내는 사흘 동 안 편두통의 고문에 시달리는 와중”에 도 자신은 “명석한 정신을 유지했으며, 사물에 대해 아주 냉정하게 숙고했다” 라고 말한다. 건강한 상태였더라면 그렇 마루야마 겐지는 부모에게도 국가에게도 의존하지 말라며, 홀로 자신만의 길을 가라고 주문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외로운 것은 무리와 떨어져 혼자일 때가 아니라, 자기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스스로와 이별했을 때이다. 때로는 고독을 자청하는 것도 좋다. 강요된 고독은 나를 힘들게 만들지만, 자발적인 고독은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삶의 근육을 키워주기도 한다. 혼자라도 괜찮아. 면의 고독을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자주 혼 자 있는 것은 오히려 고독을 풀어주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철학자 니체의 삶은 인간이 고독 속에서 오히려 강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니체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서양 철학자로 꼽힌 다. 대부분의 철학서가 그렇지만 니체를 읽는 것은 결코 쉽 지 않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니체에 관한 책을 읽고 강 의를 들으러 다닌다. 무엇 때문일까. 다들 사는 게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다. 삶이 힘들고 외롭다고 느끼는 많은 사람이 니체를 통해 자기 자신을 사 랑하고 고통을 극복해 나갈 힘과 용기를 얻고 싶은 것이다. 나 또한 과거 세상 속에서 고독을 겪었던 시절에 니체 를 읽으면서 마음을 단단히 다잡던 시간이 있었다. 니체는 “나는 고독이 필요하다”며, “보라, 난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 해야 하는 존재다”라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아주 거센 바람처럼 저들의 머리 위 높은 곳에 살고자 한다. 독수리와 이웃하고, 만년설과 태양과 도 이웃하면서 말이다. 거센 바람이라면 그렇게 산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니체가 우리에게 그런 힘을 줄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20

2023. 09 vol.675 기 괴로워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 고 통을 누군가 대신 없애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초식동물의 흔적인 그런 겁많은 특질이 모여 불필요한 집단과 조직을 만들고, 사회와 나라를 이룬다. 그리고 그 세계를 반듯하게 관리할 능력이 있을 법한 인물을 추대해서는, 그를 따르고 충성할 것을 맹세함으로 써 한순간이나마 안심하려 한다. 겐지는 부모에게도 국가에게도 의존하지 말라며, 홀 로 자신만의 길을 가라고 우리에게 주문한다. 그 길에서 벗 은 오직 고독뿐이다. 겐지는 “지상의 보물인 자유에는 언제 나 고독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며, “자유와 자립의 정신이 야말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증거”이고 “불안과 주저와 고뇌야말로 살아 있는 증거”라고 말한다. 살아 있으면서 절대적인 안녕을 얻으려 한다면, 그것 이야말로 산송장의 삶인 것이다. 나의 길을 가기 위한 고독 과 고뇌는 내가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증거다. 그러니 혼자임을 겁낼 이유가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외로운 것은 무리와 떨어져 혼자일 때가 아니라, 자기의 모 습을 잃어버린 채 스스로와 이별했을 때이다. 때로는 고독 을 자청하는 것도 좋다. 강요된 고독은 나를 힘들게 만들지 만, 자발적인 고독은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삶의 근육을 키 워주기도 한다. 혼자라도 괜찮아. 게 숙고하지 못했을 것이고 충분히 예리 하지도 못했을 것이라며 오히려 병이 자 신을 깨어 있게 했다고 받아들인다. 니체에게 고통은 살아 있다는 증 거였다. 병은 살아 있는 사람만이 걸리 는 것이고, 죽은 사람은 병에 걸릴 수조 차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병과 싸워 이겨 내는 것이었다. 니체의 삶을 아는 사람 이라면 그의 말들이 단순한 허언이 아 닌, 삶 그 자체였음을 알 것이다. 그래서 니체에게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니체 의 힘은 철학과 삶의 일치로부터 나오 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가장 고독한 가운 데 최고로 각성될 수 있으며, 그럴 때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많은 것을 이루 어낼 수 있음을 니체는 보여주었다. “그 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그를 더욱 강하 게 만든다”던 니체의 말은 그 자신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혼자서 망치를 들고 2000년 넘게 이어온 서양의 정신을 파괴하겠다고 나 선 두려움 없는 용기. 그런 니체를 읽으 며 우리도 덩달아 용기를 갖게 되는 이 유다. 부모에게도 국가에게도 의존하지 말라 마루야마 겐지도 산문집 『인생 따 위 엿이나 먹어라』에서 영웅에게 지배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나약한 속성을 질타한다. 인간은 왜 영웅과 지배자와 강자를 원하는가. 인간은 모두 지배받 고 싶어하는 약자이기 때문이다. 한시도 안심할 수 없는 이 세상을 자신의 판단과 결단과 실천으로 살아가 ┃ 법으로 본 세상 그럼에도 행복하고 싶다 21

● 감금에서 탈시설·탈병원, 지역사회 기반 치료로 로마법에서 ‘광기’ 있는 사람은 후견의 대상이 되어 사회생활에서 배제되었다. 그 전통은 이들을 수용소(asylum)에 감금하여 도덕 훈련을 통해 ‘제 정신’을 갖도록 만들겠다는 시도로 이어졌고, 마침 내 19세기 말 정신의학을 탄생시켰다. ‘광기’ 있는 사람을 배제하는 흑역사는 미국 에서 바뀌기 시작했다(G. Quinn: 2005). 제2차 세 계대전에 참전한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질환에 걸린 참전용사들의 치료 경험에서 지역사회 기반 치료의 중요성을 전파했다. 또, 정신병원의 열악한 치료환 경이 폭로되면서 탈원화의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 었다(A. Harrington: 2019). 발달장애인 누이를 두고 있던 케네디 대통령 의 탈시설·탈원화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배경으로 1963년 「정신지체시설과 지역사회 정신보건센터 건 1 들어가며 – 사법입원제 도입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안 논의 2016년, 강제입원의 요건을 선진국 기준에 맞 춘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 에 관한 법률」(이하 ‘「정신건강복지법」’)의 입법에 대해 일부 정신과 의사들이 크게 반발했다. 그 반발은 2018년, 강제입원의 요건을 대폭 완 화하는 ‘사법입원제 도입’ 입법안(21대 국회, 민주당 윤일규 의원)으로 이어졌으나 임기만료로 폐기되었 다가 최근 신림동 및 서현동 사건이 발생하며,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법입원제의 도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강제 입원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2 정신질환자 강제입원의 현대사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을 통한 사법입원제 도입의 전망 사법입원 인프라 부족, 거부감 없는 입원·치료가 차선 제철웅 ●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2 주목! 이 법률

축법(the Mental Retardation and Community Mental HealthCenter Construction Act)」이 제정 되었다. 이 법을 통해 전국정신보건연구소(NIMH) 와 지역기반 정신보건센터의 설립이 추진되었다. 그 러나 예산 부족으로 전국 1,500여 개의 센터 설립 계획에 한참 못 미치는, 600여 개의 설립에 그쳤다. 이런 탈시설·탈병원이 가능했던 또 다른 요인 은 항정신과 약물의 발전이었다. 약물복용으로 이 들을 지역사회에서도 관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퇴 원 후 약물복용이 중단되면서 다시 재입원하는 비 율이 증가하고(재시설화), 경범죄로 감옥으로 가는 환자들이 증가하는 현상도 발생했다. 치료와 돌봄 목적으로 정신질환자를 강제입원 시켜야 한다는 좋은 빌미가 된 셈이었는데, 이는 강 제입원 정신질환자의 시민권운동이 촉발된 배경이 었다(G.B. Melton et al.: 2018). ● 자·타해 위험성에 따른 치료 목적 비자의입원의 허용 시민권운동의 결과 나온 주목할 판결은 Theon Jackson v State of Indiana 406 U.S. 715(1972) 연방 대법원 판결,1 J.B. O’Corner v Kenneth Donalson 422 US 563(1975) 연방대법원 판결,2 Alverta Lessard et al v Wilbur Schmidt et al, 349 F. Supp. 1078(E.D. Wis. 1972) 연방순회법원 판결3 등이다. 이들 판결을 통해 정신질환으로 입원 치료가 필요하고, 자·타해의 위험이 있을 때 비자의입원이 가능하다는 실체법상의 요건이 형성되었다. 특히 1972년 Lessard 판결은 추상적 ‘위험’이 아니라 외부적으로 드러난 구체적 위험 행동이 있 을 때 비로소 위험성이 인정된다고 하였다. 물론 Doe v. Gallinot486 F. Supp. 983(C.D.Cal. 1979)에서는 중증정신장애(gravely disabled)로 생존 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음식, 의복, 주거를 돌볼 수 없 는 경우에도 자해와 동등하게 취급하는 캘리포니아 주법의 헌법 합치성을 인정하였다. 한편, 비자의입원의 요건을 엄격히 하는 판결 이 잇따르자 자의입원을 가장한 비자의입원 관행이 확산되었다. 이런 관행은 1990년, 정신질환자에게 정보제공 후에 동의를 받아야 하며, 그렇지 않고 입 원한 경우 연방수정헌법 제14조 위반이라고 판결한, Zinermon v.Burch, 494 U.S. 113(1990)을 통해 상 당 정도 억제되었다. 다른 한편 비자의입원 후의 비자의치료 관행 도 Rennie v. Klein 720 F.2d 266(3d Cir.1983)에서 도전을 받았다.4 이 판결은 비자의입원을 하더라도 치료는 정보제공 후에 환자의 동의에 따라야 하며, 환자의 옹호자(advocates)를 병원에서 지원해야 한 다면서, 강제약물 치료는 정신질환으로 판단 능력 이 없어진 경우, 약물복용이 없으면 자·타해의 위험 성이 있는 경우로 한정되어야 하고, 강제치료가 필 요한지는 정신과 전문의가 결정할 수 있지만, 환자 는 재심사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하였다. ● 「장애인권리협약」, 장애를 이유로 한 비자의입원 금지 1) 다수의 경범죄를 저지른 Jackson은 청각장애인으로 지적능력이 낮아 형사재판을 받을 소송능력이 없었다. 인디애나 주법에 따라 소송능력 이 회복될 때까지 무기한 수용시설에 감금되었다. 2) 편집형 조현병(paranoid schezophrenia)이 있지만 자·타해의 위험이 없는 Donalson을 부친이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15년 넘게 정신병원에 있었는데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하였다. 3) 정신질환자인 Lessard가 경찰관에 의해 응급입원된 후 지속적으로 퇴원 요청을 하였으나 위스콘신 지방법원 판사가 퇴원을 막자, 경찰 관, 판사 등을 피고로 퇴원 및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4) 조종사이자 항공교관이던 Rennie는 편집형 조현병 진단으로 수차례 정신병원 입원을 해 왔고, 1976년에는 포드 대통령을 암살하겠다고 위협하여 강제입원되었다. Rennie의 공격 성향으로 다른 환자 보호를 위해 강제로 주사 약물을 주입한 사건이다. ┃ 법으로 본 세상 주목! 이 법률 23 2023. 09 vol.674

미국에서의 이런 법 발전은 대부분의 선진국 에도 영향을 미쳤다. 입원 치료가 필요한 정도의 정 신질환자가 자·타해의 위험성이 있고, 자의입원을 하지 않을 때 강제입원을 허용한다. 또한 미국에서 의 법 발전은 국제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1991년 유엔총회에서는 「정신질환자의 보호와 정신보건의 료 향상을 위한 원칙」(‘MI 원칙’)을 채택하였으며, 1997년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는 「생물학 과 의료 영역에서의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 보호를 위한 조약」(‘OVIDO 조약’)을 제정하였다. 21세기 들어 유엔은 「장애인권리협약」을 제정 하면서 장애를 이유로 한 자유 박탈을 일절 허용하 지 않도록 했다(제14조). 치료나 돌봄 목적이라 하 더라도 본인 동의 없이 입원 또는 입소하는 것은 자 유박탈적 감금이 될 수 있다. 물론, 모든 강제입원이 금지되지는 않는다. 장애중립적인 비자의입원은 여 전히 가능하다(OHCHR,: 2009). ‘장애중립적’이라는 것은 정신질환, 치매, 발달 장애의 치료나 요양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애중립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장 애(정신질환)가 없는 사람도 실질적으로 동일한 조건 하에서 강제입원될 수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장 애가 비자의입원 결정의 한 요소가 되면 「장애인권 리협약」 위반이다. 개별 진정사건에서 장애인권리위 원회는 ‘장애’를 이유로 한 비자의입원은 모두 협약 제14조 위반이라고 하였다(C.Pyaneandee: 2019). 3 강제입원 절차에 법원 개입 방식의 사법입원 강제입원 절차에 법원이 개입하는 방식은 다 양하다. 독일은 강제입원 전 구법원(Amtsgericht) 의 판결을 받아 입원시킨다. 법원 결정을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급한 상황에서는 정신과 의사가 환자 를 직접 진단하여 입원시킬 수 있다. 그러나 입원한 그다음 날까지 법원 결정이 없 으면 퇴원시켜야 한다. 법원은 본안판결 전 가처분 으로 강제입원을 허락할 수 있다. 가처분과 본안처 분으로 입원시킬 수 있는 기간은 가사소송 및 비송 사건절차법에서 정하고 있다. 독일의 평균 입원일 수는 26.5일(2020)이다. 강제입원은 특히 2주를 넘 지 않는다. 법원이 개입하는 방식은 미국은 주마다 다르 다. 법원이 입원 단계부터 개입하는 주는 법으로 단 계마다 입원기간을 정한다. 사법입원제도가 있는 미 국의 대표적 주인 캘리포니아의 경우, 정신과 의사 의 결정으로 72시간의 응급입원 후 계속 입원하려 면 법원에 신청해 4일 내 14일간 강제입원을 유지할 수 있고, 치료가 더 필요한 경우에는 14일간 연장 입 원을 결정하며, 최장 180일까지 강제입원이 가능하 다. 미국의 평균 입원일수는 6.4일이다. 영국은 정신병원의 장이 강제입원을 결정할 수 있다. 대신 환자가 ‘정신건강재심위원회(현재 제1 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이의신청 결정에 대해서도 상급위원회(upper tribunal)에 항고할 수 있다. 제1위원회는 법률가가 위원장이고, 1명의 정신 과 의사, 1명의 다른 분야전문가로 구성된 3인 위원 회가 대등한 지위에서 결정한다. 호주도 영국과 유사하지만, 강제입원 여부를 ‘정신건강심판위원회’에서 결정한다는 점에서 차이 가 있다. 프랑스는 정신병원의 장이 강제입원을 결정 하지만, 인신보호법관에게 그 사실을 통보해야 한다. 인신보호법관은 언제든지 병원을 방문해 조사할 수 있고, 정신질환자도 언제든지 그 법관에게 부적법한 강제입원이라는 이유로 퇴원을 소구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강제입원되자마자 1개월 이내에 그 적법성을 ‘입원적합성심사위원회’에서 판 단하고, 계속입원은 ‘정신건강심사위원회’에서 심사 한다. 강제입원된 환자는 언제든지 인신보호법에 따 라 지방법원에 구제를 신청할 수 있다. 제도적 틀 자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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