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법무사 3월호

ISSN 2233-4688 03 2 0 2 3 vol.669

발행인 이남철 편집인 박철훈 편집주간 김병학 편집위원 강상수·강성구·강신기·권중화·김정준·김정호·박성익 박윤숙·윤정진·윤평식·이경록·장태헌·정진홍·최상익 편집장 임정와 편집간사 김승준 발행처 대한법무사협회 발행일 2023년 3월 5일통권제669호 디자인·인쇄 주식회사더블루랩 일러스트 혜영드로잉 정기간행물등록 1965년 5월 7일강남, 라 00102호 주소 서울시강남구논현로 651 (논현동, 법무사회관) 전화 02)511-1906~9 팩스 02)546-4362 이메일 <편집부> kabl@hanmail.net 홈페이지 www.kabl.kr 비매품 ※ 본지에 게재된 글들은 대한법무사협회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 전 , 대 면 상 담 3 월 법 무 사 의 소 소 일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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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사가 함께합니다

Contents 2023년 3월 vol. 669 22 32 법으로본세상 10 열혈 법무사의 민생 사건부 _ 대리계약 임차인에 대한 부동산인도청구사건 (2007. 서울서부지방법원) 16 그럼에도 행복하고 싶다 _ 가족, 소중한 것은 내 가까이 있다 22 주목 이 법률 _ ‘한국형 제시카법’ 도입의 문제와 과제 26 법률고민 상담소 _ 민사소송, 형사, 민사집행 분야 30 새로 시행되는 법령 _ 「상표법」 일부개정(2023.2.4. 시행) 등 89 내가 만난 법무사 _ 장태헌 법무사(인천회)

법무사시시각각 32 이슈와 쟁점 _ 정부부처 합동 ‘전세사기 예방 및 피해지원 방 안’(2023.2.2.)에 대한 검토와 과제 _ 초거대 AI, ‘챗GPT’의 등장과 법조의 미래 _ 사회적기업의 등록제 전환과 향후 과제 44 발언과 제언 _ 「국가공무원법」 제69조제1호(피성년후견인 국가 공무원 당연퇴직) 위헌 결정의 의미 _ 대법원의 ‘상고심 관련법 개정의견(상고심사제 도 입)’ 국회 제출과 과제 48 법무사가 사는 법 _ 행정사 겸직하는, 조창환 법무사 52 성년후견 사례 _ 미성년후견인 조모의 사망으로 인한 미성년후견 인 (재)선임 청구 슬기로운문화생활 08 미경유람 _ 제주 서귀포의 봄 70 문화로 쉼표 _ (수상) 인플레이션을 지나는 자세 _ (시) 산수유 72 한국인은 왜 _ 한국인이 유독 ‘위화감’을 많이 느끼는 이유 74 부자되는책읽기 _ 김광석, 『긴축의 시대』 76 소확행 건강관리 _ 운동 싫어하는 사람이 운동 습관 들이려면? 동정·등록 80 협회는 지금 _ 협회 · 지방회 · 법무사 동정 85 법무사 신규등록 · 등록공고 88 편집위원회 레터 _ ‘법무사TV’ 출연기 80 48 현장활용실무지식 54 맞춤형 최신 대법원 판례 요약 _ 2022.12.15.자 2022그768결정 등 58 나의 사건수임기 _ 계모의 증여부동산에 대한 유류분반환청구소송 _ 토지인도청구소송에서 지상물매수청구권에 대한 방어

제주서귀포의봄 08 미경유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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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이부동산투자가 몰고온후폭풍 대리계약임차인에대한부동산인도청구사건(2007. 서울서부지방법원) 유병일 ● 법무사(서울서부회) 10 열혈 법무사의 민생 사건부 법무사가실제수임한, 이시대민초들의생활사건이야기

2023. 03 vol.669 부모님이투자한아파트는어디에, 세입자는누구? 서울에서 대학원에 재학 중인 나어린 씨의 부모 님은 서울에 거주하는 자녀를 위해 집 한 채를 마련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금이 부족해 낡고 작은 소형 아 파트를 구매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이왕이면 나 중에 재건축·재개발이 되어 투자가치도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마침 알음 알음으로 알게 된 부동산투자회사 직원이 자신의 회사 에서 재건축을 추진 중인 소형 아파트가 있는데, 재건 축이 완료되면 입주권이 나와 큰 이익을 볼 수 있을 거 라며 적극적으로 구매를 권유했다. 애초 바랐던 조건과 딱 들어맞는 집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은, 서둘러 구매하라는 직원의 말에 어디에 있는 어떤 집인지, 누가 거주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그 직원의 말을 따라 여기저기 서류에 도장 을찍고, 나어린씨명의로소유권을취득하게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재건축은 진행되지 않았 고, 재건축을 추진하던 부동산투자회사도 없어졌다. 그 직원을 믿고 모든 것을 맡겼던 부모님으로서는 망 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 대체 아파트는 어디에 있 으며, 거주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런데도 소유권은 있 으니 재산세 고지서가 때마다 날아들었다.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나어린 씨에게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았 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 황당한 이야기에 나어린 씨는 며칠을 고민하다 필자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부동산의 소유자로서 정당한 소유권 행사를 하 고 싶다는 나어린 씨의 말에 부동산등기부등본을 발 급받아 보니 소유자는 나어린 씨가 맞았고, 가압류나 근저당 등 문제 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부동산만 인도받으면 되니 별로 복잡한 사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파트에 누가 거주하 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 나어린 씨에게 동 주민센터 에서 전입세대열람을 신청해 주민등록표상 전입신고 가 되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도록 했다. “전입신고는 한 명만 되어 있었어요. 부모님도 아 파트가 어느 지역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임대를 했겠 냐며, 세입자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럼 간단하다. 임대차계약도 체결하지 않은 채 무단점유 중에 있으므로, 소유자인 나어린 씨가 세입 자를 상대로 부동산인도청구소송을 하면 그만이다. 그 러나 이는 앞으로 사건이 어떻게 점입가경 황당 전개 를 하게 될 것인지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필자의 순 진한 생각일 뿐이었다. 세입자내보내려부동산인도소송, 그러나 “대리인과계약” 주장 필자는 부동산등기부등본과 전입세대열람내역을 첨부해 “원고는 피고와 임대차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없어 피고가 무단점유를 하고 있으므로 부동산을 인 도하여 달라”는 취지의 부동산인도청구소장을 작성하 여 제출했다. 나어린 씨나 그 부모님이 전혀 모르는 사 람이라고 하니 다른 사실관계를 주장하거나 법적으로 복잡한 내용이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얼마 후 피고의 답변서가 도착했다. 나어린 씨가 학업으로 법원 서류를 받기 어렵다고 해 필자를 송달영 수인으로신고해둔탓에사무소로발송된답변서를확 인할수있었다. 그런데답변서의내용이기가막혔다. 피고는 “김무단”이라는 사람으로, 자신은 “이무 권”이라는 원고의 대리인과 보증금 5,000만 원에 전세 계약을 체결했다면서 대리인 위임장과 임대차계약서, 원고의 인감증명서를 제출한 것이었다. 무단점유가 아 니라 대리계약 체결이라니, 나어린 씨가 부모님에게 알 아본 사실은 이러했다. “그 투자회사 직원이 여러 서류를 내밀며 도장을 찍으면 된다고 해서 그냥 여기저기 제 도장을 찍으셨다 고 해요. 그 서류들이 무슨 서류들인지는 잘 모르겠다 는데, 임대차계약서에는 도장을 찍은 적이 없다네요.” 그러나 임대차계약을 위한 대리인 위임장에는 분 명히 나어린 씨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부모님이 여러 ┃ 법으로본세상 열혈 법무사의 민생 사건부 11

부모님은어디에있는어떤집인지, 누가거주하고있는지도모른채여기저기 서류에도장을찍고, 소유권을취득하게되었다. 그러나고대와는달리재건축은진행되지 않았고, 결국재건축계획이무산되었다. 재건축을추진한다던그직원의투자회사도 없어졌다. 그런데도소유권은있으니 재산세고지서가때마다날아들었다.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고 하니 위임장 역시 그런 서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다만, 김무단이 이무권에게 지급 했다는 보증금 5,000만 원을 부모님이 받은 사실이 없 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혹시 다른 단서는 없을까 하여 김무단이 제출한 답변서와 첨부서류들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피던 중, 몇 가지 이상한 점이 포착되었다. 우선 피고가 제출한 계약서는 형식을 갖춘 것 같 지만, 확정일자가 없었고, 임대인 표시에 나어린 씨의 전화번호가 없었다. 그리고 대리인 위임장에 날인된 도 장이 나어린 씨의 인감도장과 비슷해 보였지만, 첨부된 복사본 인감증명서와 비교해보니 다른 도장이었다. 사 문서 위조의 가능성이 보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피고의 주민등록표 초본에 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피고가 제출한 계약서상의 부 동산인도일은 2005.5.10.이었고, 김무단은 그 전인 2004.05. 종로구에 주소를 두었다가 2006.10. 무단 전 출로 직권 말소된 기록이 있었다. 즉, 김무단은 인도일 후 한참 동안 전입신고를 한 사실이 없으며, 확정일자 가 없고, 나어린 씨에게 연락한 사실도 없다는 뜻이다. 필자는 계약서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재빨리 컴퓨터를 켜고, 이상의 문제들을 기술하며 계약 서의 진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원고(나어린 씨) 는 이무권에게 대리권을 수여한 적이 없으므로, 이무권 의 ‘무권대리’를주장하는준비서면을작성해제출했다. 두번소송은싫다는의뢰인, 대리인을피고로추가해 1회적해결 한편, 소송과 별개로 나어린 씨는 답변서의 첨부 서류에 있는 이무권의 주소지로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임대인인 내가 대리권을 수여한 사실이 없는데, 당신 이 어떤 경위로 대리 임대차계약을 체결한 것인지 알 려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무권에게서 답변은 오지 않았다. 나어 린 씨는 왠지 불안해졌다. 무권대리를 주장하는 재판 에서 승소한다면, 임대차계약은 무효가 되어 나어린 씨는 김무단에게 보증금 반환 없이 부동산을 인도받 을 수 있겠지만, 만약 패소한다면 김무단의 임대차기간 만료일 이후 나어린 씨가 김무단에게 보증금을 반환한 후 부동산을 인도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보증금 5,000만 원을 이무권에게 돌려받기 위해서는, 이무권 을 상대로 반환소송을 해야 할 것이 뻔했다. 나어린 씨는 부모님이 여기저기 도장을 찍은 데 다, 대리인의 위임장까지 제출되었으니 패소할 수도 있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학업에 열중해야 하는 12

2023. 03 vol.669 상황에서 황당한 사건을 겪고 소송을 진행하다 보니 많이 힘들고 지친 상태여서, 두 번의 소송을 치르고 싶 지는 않았다. “법무사님, 패소했을 때 별도로 소송하지 않고 이 번 한 번으로 이무권에게 보증금 5,000만 원을 돌려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그렇게 할 수 있으 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러나 피고의 “대리인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주 장과 원고의 “피고와 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으니 부동 산을 인도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피고의 주장이 받 아들여질 경우를 대비한 “피고가 이무권에게 주었다 는 보증금 5,000만 원을 받도록 해달라”는 원고의 요 청, 이 세 가지는 하나의 사실관계에서 양립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도 의뢰인이 일회적 해결을 원하니 필자는 어떻게든 양립 불가능한 2가지 내용을 한 번의 소송으 로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다. 그러다 한 가지 방법이 생 각났다. 바로 「민사소송법」 제70조(예비적, 선택적 공 동소송에 대한 특별규정)를 적용, 예비적 피고로 이무 권을 추가하는 것이다. 필자는 ‘대법원 2007마515결정’을 인용하여 원 고의 주장 즉, 김무단은 무단점유자라는 주장과 이 주 장이 입증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이무권이 정당한 대리인이거나 무권대리의 추인을 전제로 수령한 보증 금 5,000만 원을 지급하라는 주장은 양립불가능한 주 장이라는 점을 예비적 피고의 추가 신청 이유로 적시 하고,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런 신청은 처음인 데다 관련 자료도 찾을 수 없 어 신청서 작성에 애를 먹었다. 법원 담당자도 처음 보 는 서류라며 당황스러워했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인 예 비적 피고 추가신청서는 한 달 후 법원의 인용 결정이 났다. 필자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제 나어린 씨의 요청대로 하나의 재판에서 양립 불가능한 2가지 주장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재판부, “세입자는인도, 대리인은보증금반환” 강제조정결정 이렇게 부동산인도청구소송의 피고로 이무권이 추가되었다. 법원에서는 김무단과 이무권 두 사람에게 피고추가결정문을 송달했고, 이무권에게는 소장 및 원 고·피고가 제출한 준비서면이 전부 송달된 후 변론기일 이 지정되었다. 나어린 씨에 따르면 변론기일에 피고 이무권은 불출석했고, 김무단은 이무권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단다. 재판부는 김무단에게 건물을 인도하거나 이무 권이 수령한 보증금 5,000만 원을 원고에게 반환하는 것으로 판결할 수밖에 없으니 이무권과 연락하여 적절 한 조치를 취하라는 취지의 말을 하면서, 김무단에게 보증금을 준 사람과 연락도 안 된다니, 통화 한 통 없 이 5,000만 원이라는 거금을 준다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다며 임대차계약에 대한 의문을 표했다고 한다. 필자는 원고가 원하는 방향으로 소송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김무단과 이무권이 준 비서면을 제출하며, 새로운 주장을 해왔다. 피고 이무 권이 자신은 원고의 모친에게 위임을 받아 임대차계약 을 체결했고, 당시 원고가 소유권을 취득하면 소유권 을 행사하지 않고 재개발·재건축 시 입주권만 가지기 로 했다며, 원고의 주장은 부당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필자는 바로 준비서면을 작성했다. “피고들의 주 장은 소유권을 제한하는 것으로 물권법정주의를 위반 ┃ 법으로본세상 열혈 법무사의 민생 사건부 13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피고들의 주장을 입증할 아 무런 증거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장시간 소송을 유지 하기 어려우니 “김무단은 거주기간까지 거주하고 나가 고, 바로 그날 이무권이 보증금을 지급하며, 소송비용 은 각자 부담하는 것으로 조정해 달라”는 취지를 적시 하여 제출했다. 나어린씨는당장부동산을인도받는것보다분쟁 의 조속한 해결을 원하고 있었다. 변론기일에 재판부는 원고가 원하는 조정안대로 조정할 것이며, 조정에 이의 가 있으면 판결하겠다고 변론을 종결하면서, 김무단이 부동산을 인도하거나 이무권이 원고에게 5,000만 원을 주는것을피할수없다는취지의말을했다고한다. 재판부의 말이 그렇다니 소송은 잘 마무리될 것 이다. 얼마 후 법원에서 강제조정결정문이 송달되었다. 예상대로 “원고가 원하는 대로 계약기간까지 김무단 은 거주하다 부동산을 나어린에게 인도한다. 보증금은 이무권이 지급한다”는 내용으로, 두 개의 주문이 동시 이행이 아니라 개별 이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원고가부동산을인도받는데아무런문제가없는 조정안이었으므로 이의를 신청할 이유가 없었다. 나어 린씨도이제소송이마무리되었다며만족스러워했다. 피고들의이의신청, “애초계약사실이없다” 황당주장 그러나 산 넘어 산, 점입가경은 이럴 때 필요한 말 인가 보다. 느닷없이 김무단과 이무권이 강제조정에 대 한 이의신청을 한 것이다. 그런데 피고들의 준비서면 내용이 필자의 눈을 의심케 했다. 김무단이 자신은 “나어린과 계약을 체결한 사실 이 없으며, 이무권도 대리인이 아니고, 부동산의 전 소 유자인 전주인과 임대차계약을 체결했다”고 주장한 것 이다. 그리고 계약서를 분실했다며 전주인의 확인서를 떡하니 제출하였다. 그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1년이 넘도록 대리인 이 무권과 계약을 체결했다고 주장해 놓고는 이제 와서 지금까지의 주장을 전부 부정하고 새로운 사실관계를 주장하다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김무단이 제출한 계약 서는 스스로 위조를 인정하는 것이므로, 사문서위조 및 동행사죄로 고소가 가능했다. 그러나 나어린 씨는 또 다른 분쟁 없이 소송을 빨리 종결하기만을 원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어린 씨가 찾아왔는데, 김무단 의 확인서에 있는 전주인의 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사 실은 자신이 임차인이었다가 김무단이 임차인이 된 것 이라는 황당한 소리를 하기에 “등기부에 당신이 전 소 유자로 되어 있는데 임차인이라니 무슨 말이냐”고 따 졌더니 횡설수설해 “소송사기로 고소하겠다”고 했더니 전화를 끊더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전주인의 가족이라는 사람이 전 화해 “전주인이 지금 밥도 못 먹고 있다. 왜 겁을 주느 냐. 전주인이 당신에게 부동산을 매도하고, 당신이 김 무단에게 임대한 것은 사실이 아니냐”고 해서 “전주인 의 주장과 다른 말을 하는데, 나는 그런 적 없다”고 했 더니 그 사람 역시 횡설수설하다 전화를 끊었다며, 뭐 이런 사람들이 있냐고 황당해했다. 필자는 피고들이 제출한 전주인의 확인서는 인정 할 수 없고, 나어린 씨와의 전화 내용으로 볼 때 피고 들의 주장은 앞뒤가 다르고, 법원에 제출하는 서류까 지 위조하는 자들이라 신용이 전혀 없다는 취지의 주 장을 담은 준비서면을 제출했다. 얼마 후 이의신청에 대한 변론기일이 찾아왔다. 14

2023. 03 vol.669 마지막조정안을받은나어린씨는 이의제기를하지않았고, 피고들또한이의를 제기하지않아치열한공방을해온것에비해 의외로싱거운결말을맞았다. 김무단은부동산을인도했고, 부모님에게투자를 제안했던그직원으로추정되는, 이무권역시 나어린씨에게1,000만원을입금했다. 재판부에서 피고들에게 유불리를 떠나 실제로 있었 던 일을 이야기하라고 하니 “분쟁 부동산은 시세가 1억 원가량으로, 5천만 원은 원고 모친, 나머지 5천만 원은 김무단의 돈이다. 김무단이 바로 전입신고를 안 한 것은 부채가 많아 다른 채권자들이 집행할까 봐 그 런 것이며, 계획대로 재개발이 되었다면 나어린은 추가 로 5천만 원을 지출해도 아파트 입주권을 받을 수 있 으니 이득이다. 그런데 재건축·재개발이 무산되면서 일 이 틀어졌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말도 다 신뢰할 수는 없었으나, 재판부는 알았 다며 선고기일 지정 후 변론을 종결했다. 결국재판부의마지막조정안수용, 사건마무리 변론 종결 후 판결을 기다리던 중 변론이 재개되 었다. 재판부는 판결 전 마지막으로 조정안을 냈다. “김 무단이 부동산을 인도하고 보증금은 나어린이 반환해 주는데, 이무권이 미리 1,000만 원을 나어린에게 입금 하라”는 내용이었다. 조정안을 받은 나어린 씨는 이 정도 선에서 마무 리하고 싶다고 해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고, 피고들 또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간 치열한 공방을 해온 것에 비해 의외로 싱거운 결말을 맞았다. 김무단은 부동산을 인도했고,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나어린 씨 의 부모님에게 투자를 제안했던 그 직원으로 추정되는 이무권역시나어린씨에게 1,000만원을입금했다. 복잡한 사실관계에 비해 이만하면 잘 마무리된 사건이었다. 이번 사건은 부동산 투자에 있어 정확한 사실을 모른 채 사람을 믿고 각종 서류에 도장을 찍는 행위가 얼마나 큰 위험을 초래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떻게 집의 위치도 모르고, 대리인이 누구인지, 임차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 에서 계약이 체결될 수 있는가 하겠지만, 법무사 사무 소에는 이런 깜깜이 계약이 문제가 되어 찾아오는 의 뢰인들이 의외로 많다. 한편, 법무사의 입장에서는 예비적 피고의 추가, 증거서류의 위조 등 실무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사건을 경험해 보았다는 데 나름 의미가 있었다. 법무 사로서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이례적인 사건이었 지만, 「민사소송법」에 대한 지식을 동원해 의뢰인의 요 구대로 분쟁의 1회적 해결을 이루어냈다는 것에 보람 과 만족을 느낀 사건이었다. <알림> 2022. 10월호에 소개한 건설노동자 채무명 씨의 ‘연 대보증금 지급명령에 대한 청구이의소송 사건’은 최근 항소 기각(서울동부지방법원 2022나2852*)으로마무리되었다. ┃ 법으로본세상 열혈 법무사의 민생 사건부 15

위기의시대에도행복을찾아가는 12가지인문학적성찰③ 가족, 소중한것은 내가까이있다 유창선 ● 인문학 작가 happiness 16 그럼에도 행복하고 싶다

2023. 03 vol.669 내가평생매달렸던많은것들가운데는 세월이흐르고나서보면덧없는것들이많다. 높은지위와권력, 사회적명예, 그리고돈에이르기까지 그때는그렇게도중요하다고믿었던많은것들이 시간속에서변색되거나탈색된다. 하지만가족은마지막까지변함없이내곁에남는다. 내가병들고죽을때, 마지막까지내곁에있을사람은가족이아니던가. 시간에 무엇보다 힘이 되었던 것은 나를 살리려고 애쓰던 가족들의 그런 사랑이었다. 내가 병마를 견뎌내고 다시 일 어선다는 것은 내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나를 살리 려고 고생하던 가족들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에는 눈 덮인 안데스산맥 에 불시착하여 처절한 사투를 벌이다가 구조된 비행기 조 종사 기요메의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살아 있다고 믿는다면, 아내는 내가 걷고 있 으리라생각하겠지. 동료들도내가걷고있으리라믿을거 야. 그들모두날믿고 있어. 만일 내가 걷지않는다면, 난 개같은놈이되는거야.” 그래서 기요메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기 위해 악착같이 계속 걸었다. 자신을 믿고 기다리 는사람들을위해서였다. 기요메의마음이내마음이었다. “있을때잘해”, 그냥우스갯소리가아닌이유 병실 생활을 하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재활병원에 있었을 때, 아픈 남편을 헌신적으로 병마를이겨낸힘, 가족의사랑 4년 전 제법 긴 투병 생활에 들어 갔다. 갑작스럽게 뇌종양 진단을 받고는 서둘러 수술을 했다. 위험했던 수술은 잘 되었지만 극심한 후유증들로 인해 8 개월 동안 병원에서 투병과 재활의 시 간을 가져야 했다. 그때 새롭게 깨달은 것이 가족의 소중함이었다. 아프기 이전이라도 가족 중한 줄 어디 몰랐을까. 하지만 자신이 혼자서 는 버텨내기 힘든 극한의 상황에 처했 을 때 이 세상에는 가족만 한 원군이 없음을 몸으로 알게 되었다. 이것은 인 생관까지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아내와 딸들은 나를 살리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뛰어들었다. 어떻 게든 살려내서 다시 일어서게 만들겠다 고 작심한 아내는 매일같이 병원을 오 가며, 만신창이가 되었던 내 몸이 아주 천천히 회복되는 과정을 함께 해주었 다. 오랜 투병 생활에 내가 지치기라도 할까 봐 멘탈 관리까지 도와주었다. 세 상에서 가장 서러운 것이 아플 때 옆에 서 챙겨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는 생 각이 들었다. 육체적으로는 가장 힘들었던 그 ┃ 법으로본세상 그럼에도 행복하고 싶다 17

간병을 해주고는 있지만, 그 미운 마음 을 주체하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평소 살면서 가족들에게 어떻게 했는가에 대한 채점표가 나이 들어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신이 가 족들에게 준 관심과 사랑을 아는 가족 이라면 더 크게 키워서 내게로 돌려준 다.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은 그냥 우스 갯소리가 아니다. 우리는 힘 있고 돈도 있는 시절에 는 그저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산다. 그 러다가 나이 들어 힘도 없어지고 돈벌 이도 시원치 않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 다. 은퇴하고 나면 가족들이 일제히 “아 버지 수고하셨어요”라며 반겨줄 걸로 알았지만, 정작 존재감 없이 주변으로 밀려난 것 같다는 푸념을 흔히 접한다. 대개는 잘나가던 시절에 가족들 을 사랑하는 방식에 서툴렀던 탓이 많 다. 아무리 바쁘게 일을 하는 시절이라 도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많은 대화를 나누고 정서를 공유해 나가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가족끼리 서로 무 관심하게 소가 닭 보듯 하면 나중에 가 서 그 업보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자식들과 단절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버지는 밖에 나가 일하는 가장이라 는 관념 속에서 자식들과 관련된 일은 모두 부인에게 맡겨버리고 방관자가 된 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에게 어떤 일 이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렇 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적어진다. 은퇴하 고 집으로 돌아오니 당장 자식들부터도 내 마음을 몰라주더라는 푸념은 그래 서 생겨난다. 돌보며 간병하는 배우자들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였다. 어떤 환자 아저씨는 잠시라도 눈을 떼면 위험한 상태 였다. 뇌수술을 하고 인지 기능에 문제가 생겨서 눈만 떼면 혼자서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그래서 부인, 아들, 딸이 교대 하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24시간 옆에 붙어있는 것을 지켜 보았다. 부인이 밤까지 새면서 돌보기는 벅차니까 밤이 되면 직장에서 퇴근한 자식들이 교대해서 밤을 새운다. 하루 이 틀도 아닌데, 정말 어지간한 지극정성 아니면 감당하기 어 려운 간병 생활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고 숭고 한 것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입원만 시켜놓고 한 번도 와보지 않는 남녀 배우자들의 정반대 사연들도 적 지 않았다. 같은 병실을 쓰던 어떤 장년의 남자 환자는 바 람이 나서 집을 나가 다른 여자와 살고 있다가 큰 병에 걸 렸다. 갖고 있던 재산도 다 날리고 간병해 줄 사람조차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결국 불쌍히 여긴 부인이 병실을 지키고는 있었는데, 남편에 대한 원망과 욕을 두고두고 하고 있었다. 자기 몸 하 나 가눌 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차마 내버려 두지 못해 18

2023. 03 vol.669 한 일이다. 가족이야말로 같이 살아가기에 나를 누구보다 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야 겉 으로 드러난 내 모습만 보고 나를 평가하지만, 가족은 나를 속속들이 알고서 나를 판단하게 된다. 그러니 가족으로부터의 평판은 그 누구의 것보다 정 확하고 무서운 것일 수 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아무리 화 려한 칭송을 받는 사람일지라도, 정작 자기 가족들로부터 믿음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되기 어렵다. 가족 사이에서는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이 공유될 필 요가 있다. 가정의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과정도 결과도 함 께 나누고 같이한다는 정신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집을 사 고파는 일이나 큰돈을 투자하는 일, 서로의 진로와 관련된 일 등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큰 영향을 주는 것들이다. 이런 일들뿐 아니라 가족들 간의 중요한 일에 대해서 는 함께 상의하고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의 삶이 공유될 수 있을뿐더러, 나중에 혹시 결과가 좋지 못했 을 때 그 책임을 놓고 가족 간에 갈등이 생기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부부가 함께 살면서 특히 피해야 할 것은, 어느 한쪽 을 외롭게 만드는 일이다. 부부이면서도 서로 대화가 통하 지 않아 적당히 포기하고 그냥 따로 살다시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경우 대개는 나이가 더 든 뒤에 결국 문제 가 드러나게 된다. 부부 사이에는 뒤끝이 많다. 살면서 억울했던 것들, 서 운했던 것들이 새록새록 기억나는 것이 장년 이후의 특징 이다. 참고 살다가 자식들이 다 큰 뒤에 황혼 이혼을 결심하 는 이유도 그런 것일 거다. 그러니 쓸쓸한 황혼을 맞지 않으려면 부부가 인생의 가족에게인정받지못한다면, 행복하기어렵다 가족은 내가 속해 있는 여러 공동 체 가운데서도 으뜸이다. 내가 가장 먼 저 아끼고 지켜야 할 공동체가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가족이다. 내가 평생 매 달렸던 많은 것들 가운데는 세월이 흐 르고 나서 보면 덧없는 것들이 많다. 그때는 그렇게도 중요하다고 믿었 던 많은 것들이 시간 속에서 변색되거 나 탈색된다. 높은 지위와 권력, 사회적 명예, 그리고 돈에 이르기까지 세상 속 의 많은 것들이 대개는 그러하다. 하지 만 가족은 마지막까지 변함없이 내 곁 에 남는다. 내가 병들고 죽을 때, 마지막 까지 내 곁에 있을 사람은 가족이 아니 던가. 그러니 인생의 후반기로 갈수록 가족과의 관계는 행복을 좌우하는 가 장 큰 변수가 된다. 바로 내 옆에서 인생 을 함께하는 것이 가족이라는 존재이기 에, 그 관계의 질에 따라 행복의 지수가 달라지게 된다. 가족들과 화평하게 지 낼 수만 있다면, 설혹 다른 것들에서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행복할 수 있는 것 이 우리들의 삶이기도 하다. 그런 가족의 화평을 위해서는 무 엇보다 서로 간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 야 한다. 가족 간의 신뢰는 말의 성찬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 니다. 함께 살면서 하루하루 알게 모르 게 조금씩 쌓여가는 것이 가족 간의 믿 음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족으로부터 인정받고 믿음을 얻는 것은 매우 중요 ┃ 법으로본세상 그럼에도 행복하고 싶다 19

아함과 교양이 그녀에게 불러일으킨 찬탄과, 자신의딸이그세계의일부가 되는것을보며느끼는자부심과, 겉으 로는 절묘한 예의범절을 보여주면서 속으로는 자신을 경멸하지 않을까 하 는두려움사이에서갈팡질팡했다. 어머니는 자기 자체로는 사랑받 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며, 자신이 주 려는것으로사랑받기를바랐다.” 딸이 어머니의 그런 감정을 이해 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에르 노의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 병원을 옮 겨 다니다가 세상을 떠난다. 에르노는 그런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반드시 글 로 남기고 싶었다.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를 치매에 걸린 노인으로 남겨놓는 것이 아니라, 황금 같은 시절이 있었던 어머니의 모 습을 함께 복원시켜 놓고 싶은 갈망이 었다. 어머니에 대한 글쓰기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게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사랑이었다. 아버지의장례를치르고나서도에 르노는 아버지에 관한 “이 모든 것을 설 명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 설 『한 여자』에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그랬듯이, 아버지에 대한 에르노의 기억 역시 깨알 같다. 부모의 삶을 이토록 하 나하나기억하고있는딸의마음이란. 상층 세계로 들어간 에르노는 부 모의 모습을 부끄러워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욕을 주 고 받았는데, “무능한 놈! - 미친년!” “한심한 놈! - 늙은 걸레!” 같이 상스러 운 말들이었다. 부모들의 이런 문화와 자신이 편입된 세계의 문화는 너무도 달랐다. 이제 상층 세계 속에서 살아가 소소한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노력을 젊었을 때부터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후회할 때는 이미 늦을 것 이고, 그때는 내 힘이 지금 같지 않을 때일 것이다. 떼려야뗄수없는가족, 잊히지않는존재 가족이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존재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아니 에르노의 책들은 부모와 자식 간 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기억들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 『한 여 자』에서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남자의 자리』에서는 역 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에르노의 부모는 결혼을 하고서 상인이 되었던 하층 세계의 삶을 살았다. 그 세계에서 성장했던 딸은 대학교수 가 되고 살만해지는 계급 상승을 이루게 된다. 이제 자신의 부모와 다른 세계에 살게 된 딸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이미 청소년기부터 에르노는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나 왔다. “그녀는더 이상나의모델이아니었다. 나는 『레코 드라 모드』를 넘기면 만나게 되는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민감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프티부르주아인 학급 친구들 의 어머니들은 그러한 여성적 이미지에 가까워서 날씬하 고, 행동이점잖고, 요리를잘하고, 자신들의딸을다정하 게 ‘사랑하는딸’이라고불렀다. 내어머니는너무요란스럽다는생각이들기 시작했 다. 나는어머니가다리사이에병을끼고서병마개를딸 때면 눈길을 돌려 버렸다. 나는 그녀가 말하고 행동하는 거친방식이부끄러웠는데, 내가얼마나그녀와닮았는지 느끼고 있는 만큼 더더욱 생생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 『한여자』 어머니는 자신이 딸에게서 경멸받을까 불안해하며, 대신 사랑을 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나의 어머니는 이 세계에 대해, 훌륭한 교육과 우 20

2023. 03 vol.669 방탕한생활끝에결국 돌아온곳은가족의품 가족은 계속 성장하며 변화하는 공동체다. 부모도 자 식도, 다들 가족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역할이 처음일 수밖 에 없기에 처음에는 다들 서투르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과 방식들도 저마다 다르다. 그러니 가족이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에게 적응하고 맞추는 노력을 하며 살아가는 과정이다. 어느 정도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나면 이전까지 불편 했던 것들이 편해지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기도 하고, 서로 간에 이견이나 갈등이 생겨도 그것을 원만하게 풀어 가는 지혜가 생겨나게 된다. 그때까지가 조금은 힘든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 가족 간의 믿음이 쌓이고 나면 그 뒤로는 그냥 물 흐르듯이 자연 스럽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렘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는 가족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는 방탕한 생활 끝에 돌아온 아들 을 두 손으로 꼬옥 품어주고 있다. 아버지는 무릎 꿇고 참 회하는 아들을 품어주며 사랑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는 딸에게는 그런 부모의 모습이 내심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에르노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렇 게 읽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가장 커다란 자부 심 아니 심지어 그의 존재 이유는 자 신을 멸시하는 세상에 내가 속해 있 다는사실이었을것이다.” 하지만 부모에게서 느꼈던 그런 거 리감은 정작 그분들이 세상을 떠나가자 부모의 삶을 온전히 복원시키기 위한 글쓰기를 낳는다. 생전의 아버지에게서 먼 거리를 확인하곤 했던 에르노에게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그와의 대화를 이어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부끄러웠고 불편했고 때로 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국은 기억하고 화해할 수밖에 없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우리에게가족이란그런것이다. 부부가함께살면서특히피해야할것은, 어느한쪽을외롭게만드는일이다. 부부사이에는뒤끝이많다. 살면서억울했던것, 서운했던것이 새록새록기억나는것이장년이후의특징이다. 쓸쓸한황혼을맞지않으려면 인생의소소한희로애락을 함께나누고공유하는노력을 젊었을때부터꼭해야한다. 후회할때는이미늦었고, 그때는내힘이지금같지않을것이다. 아니에르노의 「한여자」 ┃ 법으로본세상 그럼에도 행복하고 싶다 21

에 대해서는 전자추적장치를 부착하도록 하여 학 교 등 미성년자 교육시설로부터 2,000~2,500피트 (600~700m) 이내 거주를 제한하고 있다. 또, ④성범 죄자의지문을채취하여관리하도록하는내용이다. 2법무부, ‘한국형제시카법’ 추진계획발표 법무부는 지난 1.26., 「2023년 정부 업무보고」 를 통해 이른바 ‘한국형 제시카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법은 「특정 범죄자에 대한 보호관찰 및 전자장치 부착 등에 관한 법률」(약칭 「전자장치부 착법」)을 개정하여, 고위험 성범죄자가 출소 후, 법 원의 결정을 통해 학교나 어린이집, 유치원과 같은 보육시설 등으로부터 500m 이내(500m를 한도로 1 고위험성범죄자거주제한, 미국 ‘제시카법’ 고위험 성범죄자의 거주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른바 ‘제시카법’은 2005년, 미국 플로 리다에 사는 9세의 제시카 런스포드가 상습성범죄 자에 의하여 유괴·강간·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그해 입법된 플로리다의 주(州)법이다. 이 법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제시카 런스포드 법(Jessica Lunsford Act)’으로 명명되었으며, 이 법 의 영향을 받아 이후 다른 주도 대부분 유사한 내 용을 입법하였다. ‘제시카법’에서는 ①성범죄자에 대한 신고 의 무를 규정하고, 이를 위반할 시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고, ②12세 미만 아동에 대한 성범죄 형량 을 대폭 상향하며, ③2회 이상 성범죄를 저지른 자 ‘한국형제시카법’ 도입의문제와과제 고위험성범죄자거주제한, 예방효과검증되었나? 김대근 ●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 22 주목! 이 법률

2023. 03 vol.669 사안별로 법원이 결정)에 살지 못하도록 거주를 제 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1 구체적으로는 거주이전의 자유 등 「헌법」 상 의 기본권을 감안하여, ①그 대상을 반복적 성범죄 자, 또는 13세 미만 아동 대상 성범죄자 등 고위험 성범죄자로 한정하고, ②개별 특성을 감안한 법원 의 결정을 거치게 하는 등 우리나라의 도시밀집형 환경에 맞는 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위험 성범죄자로부터 시민의 안전, 특히 아동을 보호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임 에는 틀림없지만, 이들을 학교 근처 등에 살지 못하 도록 한다고 해서 재범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 성범 죄자들의 범죄를 막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 면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이미 제시카법이 도입된 미국에서조차 이 법 으로 성범죄가 예방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이에 대한 효과성도 검증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전자장치를 부착하고도 이를 손 괴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건들이 빈번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고위험 성범죄자들의 거주를 제한하고 접근을 금지하는 것만으로 성범죄를 예방 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문제는 예상되는 기대 효과에 비해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이 더 크다는 점이다. 3 ‘한국형제시카법’의문제점 가. 500m제한거리에대한근거부족 이 법은 학교, 보육시설(어린이집, 유치원) 등으 로부터 500m 이내 거주제한을 핵심으로 하되, 우 리나라의 도시밀집형 환경 등을 고려하여 거주지 제한거리를 500m 이내의 범위에서 법원이 개별 특 성에 따라 결정한다고 한다. 일단 500m라는 거리가 산출 근거가 없다. 플 로리다의 사례를 그대로 가져온 것도 아닐뿐더러, 그렇다고 면적이 넓고 인구밀집도가 높은 외국의 사례(예컨대, 플로리다)를 상황이 정반대인 우리나 라에서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 맞게 구체적인 범위를 법원이 결정하도록 한다고 하더라도, 법원이 거리를 산출할 과학적이거나 객관적인 근거를 찾을 수도 없을 것이 고, 무엇보다도 범죄예방 및 기본권 제한의 책임과 부담을 법원에 전가하는 것이어서, 만약 범죄가 발 생하면 국가의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진다. 나. 수도권외지역으로범죄위험전가 학교, 어린이집·유치원과 같은 보육시설로부터 의 단순히 거리를 두고 고위험 성범죄자의 거주를 제한하는방식도문제다. 인구가밀집해서학교나보 육시설이 밀집된 지역에 성범죄자가 거주할 수 없다 면, 이들은그밖에지역에서거주할수밖에없다. 다시 말해 인구밀집지역인 서울 등 수도권이나 대도시에서 성범죄자가 거주할 수 없다면, 안 그래 도 학교나 보육시설이 부족하거나 낙후된 지역으로 이들 고위험 성범죄자가 내몰리게 된다. 정말 이들 의 재범 위험성이 크다면, 또 그 위험성을 접근과 거 주의 제한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위험 을 다른 지역으로 전가하는 셈이다. 당연히 서울 등 수도권이나 대도시의 안전만 1) 법무부, 「2023년 정부 업무보고」 참조 ┃ 법으로본세상 주목! 이 법률 23

보호하겠다는 것이냐는 볼멘소리와 함께, “생활 기 반 시설도 부족한 상황에 성범죄자까지 맞이해야”2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어 해당 지역의 공동화(空 洞化)를 심화시킬 수 있다. 다. 기본권제한에있어과잉금지원칙위반 무엇보다 법무부의 「2023년 정부 업무보고」에 서도 지적하는 것처럼, 고위험 성범죄 출소자의 거 주를 제한하는 방식의 입법은 당사자의 거주이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 혹자는 성범죄자의 거주이전의 자유와 일반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충돌하는 경우, 이익형량(저 울질)을 하면 후자를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을 통해 성범죄자의 거주이전의 자유와 일반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충 돌한다는 설정 자체가 잘못된 이익형량이다. 이 사안은 이익과 이익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 므로, 목적(시민의 생명과 안전)과 수단(성범죄자 의 거주제한)을 이익의 충돌로 오해하고 저울질하 는 것은 일종의 ‘허수아비의 오류(comparing the uncomparable)’다. 당연하게도 목적인 시민의 생 명과 안전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는 이익형량이 아니라, 기본권 제 한에 있어서 과잉금지원칙 혹은 엄격한 비례성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시 말해, 이러한 입법이 기본권의 ‘침해’가 아닌 기본권의 ‘제한’에 불과하려면 목적의 정당성, 방법의 적정성, 최소 침 해성, 법익의 균형성을 요건으로 하는 과잉금지 원 칙에 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출소자의 거주이전의 자유 제한은 일 종의 ‘보안처분’이라는 점에서 재범 위험성에 비례 적으로 취해져야 한다. 그렇다면 이른바 ‘한국형 제 시카법’은 과잉금지 원칙에 부합할까? 언급한 것처럼 이 법을 통한 성범죄의 예방효 과가 실증적으로 드러난 바 없으며, 직관적으로 생 각하더라도 범죄예방의 효과는 기대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실상, 고위험 성범죄자의 거주제한에 따른 효과성은 검증된 바는 없는데, 오로지 시민들의 막 연한 두려움과 반감에 기대어 마련되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라. 사회적배제, 또다른범죄로이어질가능성 오히려 이 법의 도입으로 사회공동체로부터 지속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이 갖는 사회에 대한 분 노와 절망감이 자칫 또 다른 범죄나 극단적인 선택 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 교정의 목적이 교화와 재사회화이고, 무엇보 다 이들도 시민으로서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면, 배제와 차별만으로 형사정책의 목적 을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4 그렇다면대안은? _ 현행 ‘1:1 보호관찰전담제’ 잘활용해야 언급한 것처럼 출소자의 자유 제한은 일종의 보안처분이라는 점에서 엄격하고 비례적으로 이루 어져야 한다. 당연하게도 재범의 위험성에 대한 엄 밀한 평가를 통해서 고위험 범죄자에 대한 관리와 통제가 이루어져야 하고, 과잉금지원칙에 반해서는 안 된다. 또한 기본권 제한이 정당하려면 최소한의 효 과성이 입증되어야 하겠지만, 거주제한만으로 성범 죄 예방이라는 목적은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범죄를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까. 보다 정확히는 어떻게 하면 고위험 성범죄자로부터 시민의 안전과 아동의 보호를 도모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이들 범죄는 완벽한 근절이나 예 24

2023. 03 vol.669 방이 불가능하다. 실상 범죄는 인류와 함께 늘 있는 것이니까. 다만 범죄예방을 통해 시민의 자유와 안 전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의 존속 이유라는 점에서 이들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다각도의 입체적 노력 은 국가의 중요한 의무다. 일단 재범 위험성이 큰 고위험성 범죄자의 경 우, 범죄가 일종의 질병의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치 료 목적의 보안처분이 강화되어야 하는 등 국가의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성범죄의 경우 전자장치 부착과 화학적 약물치료, 신상정보 등록과 고지, 아동·청소년기관 취업제한과 같은 다 양한 보안처분이 존재한다. 특히 최근 「전자장치부착법」의 개정으로, 19 세 미만자에게 성폭력 범죄를 저질러 전자발찌 부 착 명령을 받은 범죄자는 교도소에서 나와도 보호 관찰관 1명이 전담하여 집중 관리하는 제도, 이른바 ‘일대일 보호관찰 전담제도’가 마련되어 있다(제32 조의2 제2항). 이 조항에 따라, 전담 보호관찰관이 대상자에 대해 ①24시간 이동 경로 집중 추적, 매일 대상자의 행동 관찰 및 주요 이동경로 점검, 현장확인 등을 통해 생활실태 점검(특히 아동 접촉 시도 여부 감 독), 그리고 ②음란물을 지니지 않도록 주의, 아동시 설 접근 금지, ③심리치료 실시 등의 집중관리가 가 능해졌다. 미흡하지만 이러한 기존 제도를 빈틈없이 잘 활용해서 고위험 성범죄자로부터 시민의 안전을 지 키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5 무조건적인배척, 범죄예방해답될수없어 거듭 강조하건대, 고위험 성범죄자로부터 범죄 를 예방하고 시민의 안전, 특히 아동의 안전을 지키 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다만 본 논의를 통해 제 시카법의 도입으로 이들 성범죄를 막을 수 없고, 오 히려 그 문제점과 부작용이 크다는 점을 제기하려 는 것이다. 부작용과 그 효과성에 대한 엄밀한 측정 없이, 시민들의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정책을 만들어 서는 제도의 취지를 달성할 수 없다. 또한 무조건적 인 배척과 차별도 범죄예방의 해답이 될 수 없다. 지극히 원론적이지만 기존의 제도를 강화하고 잘 활용하면서, 이들 또한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으 로 함께 살아가는 지혜가 적극 필요한 때다. 2) 노컷뉴스, 2023.2.22.자 「“학교 없는 것도 억울한데 성범죄자까지?" 제시카법구글지도코딩」 고위험성범죄자로부터범죄를예방하고 시민의안전, 특히아동의안전을지키는일은 너무나도중요하다. 다만제시카법의도입으로 이들성범죄를막을수없고, 부작용과 그효과성에대한엄밀한측정없이, 시민들의막연한공포와두려움으로정책을 만들어서는제도의취지를달성할수없다. ┃ 법으로본세상 주목! 이 법률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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